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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벼, 허문회 박사, 1970년대 식량자급정책, 그 외 몇 가지 본문
YTN 뉴스 영상에서 시작
[과톡] 식량난을 해결한 기적의 쌀 ‘통일벼’를 개발한 허문회 박사 & 이번 주 과학계 핫이슈 / YTN 사이언스
YTN 사이언스 2022.9.7.
https://www.youtube.com/watch?v=5QHRGhEbd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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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사진에 나온 분들, 자손들에게 말씀 잘 남기셨을지 모르겠네요. 이거 내 인생샷이라고. ㅎㅎ
🔎 통일벼 허문회 박사: Google 검색
www.google.com
🔎 통일벼 개발: Google 검색
www.google.com
[한국 과학기술의 결정적 순간들] 1977년 허문회, 통일벼로 쌀 자급 달성
2023년 1월 16일
https://horizon.kias.re.kr/23610/
[한국 과학기술의 결정적 순간들] 1977년 허문회, 통일벼로 쌀 자급 달성
1977년 12월 20일, 대한민국 정부는 공식적으로 쌀 자급을 달성했음을 선포하고, 벼 신품종 개발에 참여한 농업과학자들과 신품종 보급에 앞장선 농촌지도 공무원들에게 훈장을 수여하였다. 박정
horizon.kias.re.kr
통일벼 개발과 녹색 혁명
유신체제와 함께 피고 진 식량자급의 꿈
1971년 ~ 1980년
https://contents.history.go.kr/mobile/kc/view.do?levelId=kc_i503300&code=kc_age_50
글 자체는 왜 저렇게 썼는지 이상하게 느껴질 만큼 은근히 부정적인 분위기로 씌어져있습니다.
하지만 입이 비뚤어졌어도 말은 바로 해야..
통일벼는 인구가 가장 가파르게 늘어나던 1970~1990년대 한국인과 함께 한 쌀품종입니다.
통일벼가 없었으면 인구가 천 만 넘게 늘어나는 동안 안 그래도 무역적자가 계속된 시기에 더 힘들었겠지요. 그리고 1980년대에 경상수지흑자를 보기 시작했어도 그 외화로 칼로스쌀을 더 많이 수입해 사먹고 있었겠지요.
- 인구. 전후 베이비붐 세대가 자라나고 또 자식을 낳기 시작하면서 인구폭발이라는 말이 나오던 시대. 농경지가 인구만큼 늘어날 리가 없으니 당연히 식량부족.
https://www.macrotrends.net/global-metrics/countries/kor/south-korea/population
ㅡ 원래부터 있던 보릿고개는 더 심화.
ㅡ 결국 정부는 쌀말고 다른 것도 좀 많이 먹자는, 혼식, 분식 장려 정책 + 쌀로 밥 말고 다른 것 특히 술만드는 것 금지. 1 2 3
ㅡ 공급을 늘리려는 노력으로, 다수확 신품종 개발.
처음에는 이집트의 열대성 자포니카쌀을 들여와 서울대에서 연구, 희농 1호를 개발(?)했지만 보급에 실패. 4
국제미작연구소의 기술지원을 받으며 그곳에 재직하던 허문회박사가 개발한 품종을 기반으로 육종해 나온 것이 통일벼.
통일벼는 키가 작아 잘 쓰러지지 않고, 개발 시점에는 병충해에도 강했고 5, 기존 품종대비 생산량이 월등했다. 6 7
통일미 자체는 자포니카쌀(일반미)보다 맛이 못했다. 하지만 일단 먹고 살아야 했고, 보리밥먹을래 통일미밥먹을래하면 그래도 쌀밥.
1971년에 시험재배해 밥맛 평가. 1972년부터 보급 시작.
ㅡ 이 통일벼를 전국에 집중 보급하며 전국의 농촌행정을 통일벼 재배에 최적화.
ㅡ 심던 것을 심으려는 관성이 강한 농가에서 따르지 않으면 행정수단을 동원해 재배를 강제해서라도 점차 통일벼 재배 면적을 늘려감. 8
ㅡ 수확이 늘어 일시적으로 농가 소득이 도시를 앞지르기도.
1975년 쌀생산량 426만 톤으로 쌀을 한참 많이 소비하던 그때 이미 주곡자급 달성.
1977년에는 통일벼 재배면적이 일반미 재배면적보다 많아졌고, 농가 평균 쌀수확량은 ha당 4.94톤으로 쌀생산량 600만 톤 기록.
여기까지 오자 쌀이 남는다고 보고 쌀막걸리, 쌀엿, 쌀떡 제조 허가. 인도네시아에 쌀 수출.
이때가 가장 좋았던 시절.
그리고,
ㅡ 1978년에는 통일벼 단일 품종이 전체 재배 면적의 7할을 넘었는데... 통일벼 재배면적의 증가는 일부는 일반미 재배에서 전환한 것, 다른 일부는 밭 중에 논으로 전환할 수 있는 것을 전환하면서 벼농사로 바꾼 것. 9
또한 위 링크의 기술에서, "잡곡재배가 줄어 전체 식량 자급률이 하락하여 1962년 94.6%에서 1980년 69.9%로 저하되었다"고 은근히 비판하지만, 이 기술은 산수를 모르는 자의 헛소리다. 우선 모든 국민은 옥수수밥, 콩밥보다는 쌀밥을 선호했고 지금도 건강상 이유가 아니면 그렇다. 그리고 통일벼의 생산성이 좋아도 식량 자급률 하락은 피할 수 없다. 1962년의 인구는 2600만 명이고, 1980년의 인구는 3800만 명으로, 1200만 명이나 늘어나 있는데, 전체적인 식량자급율(쌀자급율이 아니라 식량자급율이다)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10
그리고 생태문제로,
ㅡ 1978년부터 1980년 사이에 벼 도열병이 대규모로 유행했는데, 특히 통일벼가 취약해 큰 피해를 입었고, 통일벼는 보급된 단일품종이었으므로 더 취약했다. 여기에 수급면에서의 아래와 같은 변화는, 정부의 강력한 드라이브가 사라지자 통일벼가 시장에서 퇴출되는 원인이 되었다. 11
ㅡ 그리고 그 전부터 일반미의 생산성이 꾸준히 향상돼 통일벼와의 차이가 초기보다 크게 줄어들었다. 여기에 시중에서 맛있는 일반미는 비싸게, 그보다 맛이 못한 통일미는 싸게 팔렸기 때문에 12 농민들은 경제성면에서도 일반미를 선호했다. 13
ㅡ 인구는 계속 증가했지만 1980년대 이후로는 이모작으로 생산하는 보리 소비는 줄었어도100% 수입하는 밀가루 소비가 늘었다. 식생활 자체가 바뀌었다. 그리고 인구증가세가 둔화되는 한편 1인당 쌀 소비량은 줄어드는 추세가 되었다. 14 15
ㅡ 새로 들어선 정부의 농정 전환. 농업정책에 예산지출을 줄이고, 교역규모가 늘어 달러가 많아진 만큼 식량안보도 자급 최우선보다는 사올 건 사오는 쪽으로. 그리고 통일벼 재배 드라이브의 포기.
(단일품종에 너무 의지했다가 때마침 크게 생긴 병충해에 대거 피해를 입어 식량안보에 타격을 받았다고 생각하면, 통일벼만 재배하라는 행정은 한계점에 와있었고, 새 발상으로 전환이 필요했다고 해도 된다)
통일벼의 현재
ㅡ 통일시대와 갑작스런 식량안보사태를 대비한 다수확품종 종자로서 개량종을 육종해 준비하고 있고
ㅡ K-라이스벨트 사업, 즉 적도 아프리카 국가들의 식량자급에 도움이 되도록 통일벼 계통 벼의 종자와 전체적인 농업경영기술과 행정 노하우를 보급하는 공적 원조사업이 있습니다.
- 일제강점기를 알 리가 없는 연세인 생존 어르신들이 어린 시절을 회상하며, "그때 단속하러 오면 어머니가 술(아마 막걸리)단지를 안고 산으로 도망갔다"고 한 것은 아마 저 시절 이야기였던 것 같습니다. [본문으로]
- 저런 식량사정을 알지 못하거나 알면서도 일부러 무시하고 당시 정부가 야만적이었다고 강조하려고 전통주의 맥락이 끊겨서 어쩌구하던 글자 그대로의 "미식을 즐기는 호사가"내지, "닥치고 정치"만 하는 멍청이들은 그저 쓰레기일 뿐. 그런 자들에게 제대로 된 역사를 배울 수는 없죠. [본문으로]
- 먹을 쌀이 부족하면 술빚지 말라고 금주령내린 것은 조선시대에도 그랬지만, 그래도 현대에는 밀이나 고구마나 옥수수나 타피오카로 술/주정을 빚을 수 있었으니까, 술마시려는 욕구를 풀 수는 있어서 그나마 행정이 통했달까. 일제강점기에도 주세 부과를 위해 사설 양조를 단속했지만 그렇게 효과는 없었다죠. [본문으로]
- 몇 가지 설에 따르면, 일부에서 개발이라 적기는 하는 모양이었지만. 실제로는 가져온 현지 볍씨를 그대로 심었다는 모양입니다. 그래서 종자 자체가 한국의 풍토에 맞게 개량된 것이 아닌데다, 재배법 역시 당시 심던 토종벼와 달라 실패했다고. 이 두 가지 실패 교훈은 결국 통일벼의 개발과 보급에 반영됐고 성공의 밑거름이 됩니다.
https://www.gn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493046
[농업이야기] 기적의 볍씨 희농1호 이야기 - 경남일보
혹시 ‘희농1호’ 를 들어본 적이 있는가? 식량이 부족했던 1960년대 박정희 정부의 중요 국정과제 중 한 가지는 주식인 쌀의 자급이었다. 그러니 당시 최고 권력
www.gnnews.co.kr
https://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542467.html
“통일벼로 통일하고 유신벼로 유신하자”
김일성은 모든 인민이 이밥에 고깃국 먹는 날을 고대하며 “쌀이 곧 공산주의”라고 주장했다. 비슷한 시기 남쪽의 박정희도 주곡인 쌀의 자급자족을 위해 엄청난 노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공
www.hani.co.kr
https://www.joongang.co.kr/article/1002251
「희농1호」를 벗긴다 | 중앙일보
미곡증산에 혁명을 가져온 것으로 전해진 색다른 벼 희농1호는 품종으로서는 주목할만한 특성을 지니고 있으나 풍토적인 여건 때문에 당장 그와 같은 성과는 기대하기 어려울 것으로보여 보다
www.joongang.co.kr
- 풍수해에 강하다는 말이다. [본문으로]
- 1978년의 흉작 원인인 도열병은 돌연변이였다. 개발시기에 참고한 토착 도열병에는 강했다고 한다. 허풍이 많이 섞인 바나나밈 중에 "세계의 바나나가 한 종류라서 바나나병 하나가 세계에 유행하면 그 다음에는 그건 못 먹게 되고 새 품종으로 바뀐다"는 그런 이야기갸 생각나는 부분. [본문으로]
- 자포니카대비 인디카계통이 생산량이 많은 경향이 있다고. 대신 한국인 입맛에는 안 맞지만. 일본인도 마찬가지라서, 일제강점기때 대만에 살던 일본인들은 당시 대만섬에 수입되던 안남미와 조선쌀 중에서 조선쌀을 선호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본문으로]
- 황소도 물가에 끌고 갈 수는 있어도 물을 먹일 수는 없다는 속담이 있지요. 통일벼를 강제할 때 반발한 기억을 가진 농가에서는, 나중에 신동진벼 등 농진청에서 한국환경에서 잘 자라며 밥맛좋은 품종을 보급해도 거부하고, 일본에서 고시히카리 등 여러 종자를 밀수해 파종해 심기도 했습니다. 그러면서 인터뷰하면 일본품종심는 이유를 정부탓하고, 농진청에서는 신품종을 육종 성공하면 일단 뉴스에 나오지만 그 다음 단계로 각 도에 자리한 작물시험장에서 먼저 심어보고 그 지역의 권장품종을 정하는데.. 그 몇 년이 늦다고 해서 지방을 푸대접한다고 욕하고.. 한심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본문으로]
- 전통적으로 벼농사를 지을 수 있는 모든 땅은 우선적으로 논으로 활용했으므로, 밭을 논으로 바꿨다는 말은 밭을 논으로 바꿀 수 있을 정도로 치수사업을 했다는 말이다. [본문으로]
- 저건 정말로 숫자를 1도 모르는 문과 중에서도 상또라이가 적은 것이라고 보면 될 듯. (수학못하는 놈은 숫자를 다루는 학문하면 안 된다) [본문으로]
- 당시의 수확감소가 아마, 1980년을 전후한 시기 칼로스쌀을 수입한 것과 상관있을지도 모르겠다. [본문으로]
- 이것은 일반미 품종개량 또는 일본으로부터의 신품종 종자밀수, 그리고 통일벼 보급과 함께 체계회된 비료와 농약공급 등 농정 발전이 일반미 생산성도 올렸다고 짐작할 수 있을지도. 읽어본 글 중 일부에는 당시 통일벼가 농약과 비료를 많이 써서 일각에서는 기피했다 운운하지만, 일반벼라고 덜 썼을까? 절대 그랬을 리가 없다. 유기농 인증따위 없던 시절인데 소출이 는다면 농약과 비료를 아낄 이유가 없다. [본문으로]
- 일반미 vs 정부미(통일미) 라는 공식이 고정관념이 되면서, 아직도 정부양곡은 맛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요즘은 당시와는 비교가 안 될 만큼 저장기술이 좋아져서, 사일로에 제대로 보관하다 도정해 나온 쌀은 1~2년 묵었다 해도 밥하기에 달린 정도다. 서양식 쌀요리할 때 쓰는 칼로스쌀(그나마 한국쌀에 가깝다지만 품종도 다르고 쌀알 모양과 색도 다르다) 역시 2년 전에 도정됐다고 표시된 쌀을 국내에서 쉽게 볼 수 있다. [본문으로]
- 1969~1989년까지의 국민영양조사보고서를 보면, 보리소비는 보릿고개로 어쩔 수 없이 섭취한 시절에 171.9g으로 높았지만 혼식을 장려하던 정책이 1977년에 풀린 뒤로는 감소일로여서 1989년에는 4.3g에 그쳤다. 사람들은 보리밥을 싫어했다. [본문으로]
- 1969~1989년까지의 국민영양조사보고서를 보면, 1969년 한국인 양양섭취의 무게비율 97%가 곡물이었는데 1980년대 중반 소위 고도성장기에 들어서면 80%대 초까지 내려갔다. 1인당 하루 쌀섭취량은 1969년 559g, 1979년 478g, 1989년 355g으로 감소. 한편 콩섭취량은 조금씩 늘었는데, 이것은 콩밥이나 된장보다는 그 외 두류가공품 소비가 늘어서 그럴 것이라고 짐작한다고. 한편 육류섭취량은 1969년 6.6g, 79년 26g, 89년 45.3g으로 증가. 계란섭취도 동시기 4.2g, 12.8g, 18.5g 으로 증가. 어패류섭취도 신선/가공으로 나눠 동시기 12.1g+6.1g=18.2g. 57.3g+11.9g=69.2g, 47.8g+26.2g=74.0g으로 소비 증가. 추세를 보면, 엣날에는 육고기가 귀해서 상대적으로 수산물을 더 먹었지만 둘 다 전체적인 섭취량은 매우 적었다. 먹을 것이 흔해지면서 둘 다 섭취량이 늘었다. 그리고 한국인은 적어도 1989년까지는 육고기보다는 물고기를 더 많이 먹었다.. 그 외 특기할 만한 것은 우유 섭취량이 늘어간 것. 1969년 2.4g. 79년 10.4g, 89년 52.9g. 그 밖에 유지섭취량은 연구논문에서는 동물성만 언급. 콩기름, 옥배유, 미강유, 팜유같은 것은 이야기가 없네. 한국의 식품공업역사에서 첫 콩기름 공장은 1971년 동방유업(현 사조해표)이 시작했다고 한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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