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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9.10.26. 안중근 의사에게 사살됐을 때, 이토 히로부미의 일본 내 입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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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의 죽음이 20세기 일본과 동아시아의 역사를 바꿨다는 말이 가끔 나오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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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쿠라 사절단

네, 이토 히로부미는 이와쿠라 사절단의 핵심 멤버로 참여했습니다.
그는 1871년부터 1873년까지 약 1년 10개월 동안 미국과 유럽을 순방한 이와쿠라 사절단에서 부사(副使·부대표)라는 중책을 맡아 활약했습니다. 당시 그의 나이는 30대 초반(만 30세)으로, 사절단 수뇌부 중 가장 젊은 축에 속했습니다.
이와쿠라 사절단에서 이토 히로부미가 남긴 굵직한 흔적과 영향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사절단 내 유일한 '영어 통역 겸 대변인'이었습니다

이토 히로부미는 청년 시절 영국 유학(조슈 파이브) 경험이 있어 사절단 고위직 중 영어를 가장 잘 유창하게 구사했습니다.
  •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을 때, 그는 환영 만찬회에서 일본의 근대화 의지를 밝히는 '일장기 연설(Rising Sun Speech)'을 영어로 직접 발표해 미국 언론과 정계의 큰 찬사를 받았습니다.
  • 특명전권대사였던 이와쿠라 토모미를 대신해 서구 지도자들과의 실무 회담을 조율하는 사실상의 외교 브레인 역할을 했습니다. [1]

2. 미국의 제도와 헌법을 배우며 '근대 국가'를 구상했습니다

그는 미국에 머무는 동안 미국의 금융 제도, 헌법, 산업 시설을 집중적으로 시찰했습니다. 이때의 경험은 귀국 후 그가 일본의 초대 은행 제도를 정비하고, 훗날 헌법을 제정하는 데 지대한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2]

3. 귀국 후 내정 개혁을 주도하는 최고 권력자로 성장했습니다

이와쿠라 사절단 참여는 이토 히로부미 개인의 정치적 위상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습니다. Western 문명을 직접 눈으로 확인한 그는 사이고 다카모리 등이 주장한 '조선 정벌론(정한론)'에 반대하고, "지금은 내실을 다져 실력을 키울 때"라며 내정 개혁에 올인했습니다. 이 사절단 경력을 발판 삼아 그는 메이지 정부의 차세대 지도자로 확실하게 자리매김하게 됩니다.

 

 

1909년 당시 68세였던 그의 일본 내 발언권(영향력)

1909년 당시 이토 히로부미는 만 68세로, 당시 일본의 평균 수명을 고려하면 상당한 고령이었습니다. [1]
그럼에도 불구하고 1909년 기준 이토 히로부미의 일본 내 발언권과 영향력은 현직 총리를 압도하는 '제국 최고 권력의 정점'이었습니다. 당시 그가 가졌던 절대적인 입지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지표로 증명됩니다.

1. 천황의 판단을 좌우하는 최고 원로(겐로)들의 수장이었습니다

당시 일본은 총리나 내각이 서류상 정부를 이끌었지만, 국가의 운명이 걸린 중대사는 '겐로(元老·원로)'라고 불리는 족벌 정치인 몇 명이 밀실에서 결정했습니다. 이토 히로부미는 그 원로 중에서도 메이지 천황의 두터운 신임을 받는 서열 1위였습니다.
  • 메이지 천황은 중요 정책을 결정할 때 항상 이토의 의견을 먼저 물었습니다.
  • 총리를 임명하거나 내각을 바꿀 때도 이토의 승인이 없으면 불가능했습니다. 1909년 당시 총리였던 가쓰라 타로 역시 이토의 눈치를 보며 정책을 조율해야 했습니다. [2]

2. 일본 최대 정당(정우회)의 창립자이자 막후 지배자였습니다

이토 히로부미는 1900년 일본 최초의 본격적인 근대 정당인 '입헌정우회(立憲政友會)'를 창당했습니다. 1909년 당시에는 의장직을 후배인 사이온지 긴모치에게 넘겨준 상태였지만, 정우회 소속 국회의원들은 여전히 이토의 말 한마디에 일사불란하게 움직였습니다. [3]
  • 의회(하원)의 과반을 장악한 정당의 영수였기 때문에, 정부 세력(군부·관료)조차 이토의 협조 없이는 예산안 하나 통과시킬 수 없었습니다.

3. '추밀원 의장'으로서 헌법적 최종 승인권을 쥐고 있었습니다

1909년 6월 조선통감에서 물러난 이토 히로부미가 곧바로 취임한 자리는 추밀원 의장(枢密院 議長)이었습니다. 추밀원은 천황의 최고 자문 기관으로, 국가의 법률과 조약을 최종 심사하는 곳이었습니다. [4, 5, 6]
  • 즉, 현직 총리와 군부가 아무리 합병 조약이나 전쟁 계획을 짜와도, 이토가 의장으로 있는 추밀원을 통과하지 못하면 법적 효력을 가질 수 없었습니다.
  • 그는 조선에서 물러난 것이 아니라, 일본 본국으로 복귀해 모든 국가 정책의 최종 결재권자가 된 것이었습니다. [7, 8]
결론적으로 1909년의 이토 히로부미는 비록 노쇠했으나, 천황의 신임, 정당의 장악력, 헌법적 권력(추밀원)을 모두 손에 쥔 '상왕(上王)'과 같은 존재였습니다. 그가 하얼빈에서 안중근 의사에게 저격당했을 때 일본 사회 전체가 거대한 충격과 정치적 공백에 빠진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9, 10]

 

 

1909년 이토가 하려던 하얼빈 회담의 목적, 그리고 그의 사후 일본 정계의 권력이동

1909년 이토 히로부미가 하얼빈을 방문한 목적은 러시아 제국의 재무대신 블라디미르 코콥초프(Vladimir Kokovtsov)와 회담하여 만주와 한국의 세력권을 흥정하고 일본의 한반도 지배권을 국제적으로 공인받기 위함이었습니다. 당시 일본 내각은 이미 한국의 강제 병합 방침을 굳혔고, 이토는 러시아로부터 만주 철도 및 영토 권익에 대한 양해를 구하러 마지막 외교 행보에 나섰던 것입니다. [1, 2, 3, 4, 5]

이토 사망 직후 일본 정계의 권력 이동

  • 야마가타 아리토모의 득세: 이토라는 거대한 정치적 라이벌이자 균형추가 사라지면서, 군부(육군)의 독보적 실력자였던 야마가타 아리토모(Yamagata Aritomo)의 정치적 영향력이 정계 전체를 완전히 장악했습니다. [6]
  • 강경파 군부의 폭주 가속화: 이토의 신중론과 속도조절론이 소멸함에 따라, 일본 정계와 군부는 견제 없는 무단통치와 급속한 한일합병(1910년) 추진으로 직행했습니다. [7]
  • 정치가의 몰락과 관료·군부 주도권 강화: 민간 정당정치와 외교적 타협을 중시하던 이토 파벌의 입지가 축소되고, 철저한 군국주의적·관료적 정책 결정 구조가 일본 제국의 표준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5, 8]

 

 

만약 1909년에 이토가 사망하지 않았다면?

이토 히로부미가 1909년 하얼빈에서 암살당하지 않았더라도 초대 조선총독이 되었을 가능성은 매우 낮습니다.
역사학계의 연구와 당시 일본 제국의 상황을 바탕으로 분석한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1. 이토는 이미 조선 통감 자리에서 물러난 상태였습니다

이토 히로부미는 1906년부터 초대 조선통감으로 재임하며 조선의 국권을 빼앗는 실질적인 지배자로 군림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안중근 의사에게 저격당하기 약 4개월 전인 1909년 6월에 이미 통감직을 사임했습니다. 당시 그는 일본 정계의 최고 원로인 '겐로(元老)'로서 일본 본국의 중앙 정치와 외교(특히 러시아와의 만주 문제 협상)에 집중하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그가 다시 조선으로 돌아와 총독을 맡을 명분이나 정치적 이유가 부족했습니다. [1, 2, 3, 4]

2. '조선총독' 자리는 군인들의 몫이었습니다

1910년 한일합병 이후 설치된 조선총독부는 강력한 무력으로 조선을 지배하는 무단통치(武斷統治) 체제를 채택했습니다. 이에 따라 조선총독 직위는 일본 육·해군 대장 출신의 현역 군인만 임명될 수 있도록 법제화(조선총독부 관제)되었습니다. [4]
  • 이토 히로부미는 철저한 민간인 출신의 문관 정치인이었습니다.
  • 그는 조선 지배 방식에 있어서도 군부를 앞세운 강경책보다는 외교와 제도를 통한 점진적인 '보호국화' 방식을 선호했습니다.
  • 따라서 군부 세력이 주도한 조선총독부의 수장 자리는 이토의 정치적 성향이나 자격 요건과 맞지 않았습니다. [1]

3. 실제 초대 총독과의 비교

실제로 임명된 초대 조선총독은 육군 대장 출신의 데라우치 마사타케였습니다. 데라우치는 이토 사후 3대 조선통감으로 부임하여 한일합병을 강압적으로 마무리 지은 인물입니다. 그는 강력한 헌병경찰 제도를 도입해 조선을 무력으로 억압하는 통치 기반을 닦았습니다. 만약 이토가 살아있었다 하더라도, 이토는 도쿄에서 이 합병 과정과 데라우치의 임명 등을 배후에서 조율하는 최고 권력자(추밀원 의장 등)의 역할을 지속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만약 이토 히로부미가 살아있었다면 1910년대 조선총독부의 정책 방향에 거대한 영향력을 미쳤을 것입니다.
초대 총독이라는 '직책'을 맡지 않았을 뿐, 그는 일본 제국 최고 권력자로서 총독부의 통치 방식을 크게 바꾸어 놓았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역사학자들은 이토가 생존했다면 1910년대 조선의 역사가 다음과 같이 달라졌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4. 잔혹한 '무단통치'가 완화되었을 것입니다

실제 1910년대 조선총독부는 칼을 찬 교사가 수업하고 헌병이 즉결처형권을 휘두르는 잔혹한 무단통치를 펼쳤습니다. 하지만 이토 히로부미는 군부가 주도하는 무력 진압 방식에 강력히 반대해 온 문관 중심주의자였습니다. [1]
  • 그는 조선인들을 무조건 억압하기보다, 회유하고 교육하여 일본 제국의 순응적인 백성으로 만드는 '동화 정책'을 선호했습니다.
  • 이토가 살아서 도쿄에서 권력을 쥐고 있었다면, 데라우치 총독의 지나친 군사 독재식 통치를 견제하고 훨씬 유연한 정치적·문화적 지배 방식을 강제했을 것입니다.

5. '한일합병'의 속도와 방식이 조절되었을 것입니다

이토는 조선을 무리하게 급박하게 병합하는 것에 신중했습니다. 그는 조선의 외교권과 내정을 차근차근 빼앗아 완전히 무력화한 뒤, 국제사회의 반발을 최소화하면서 점진적으로 합병하는 시나리오를 구상하고 있었습니다.
  • 그의 급작스러운 사망은 일본 군부 내 강경파(데라우치 등)에게 "이토의 온건책은 실패했다"는 빌미를 주었습니다.
  • 그 결과 이토가 죽은 지 채 1년도 되지 않아 초고속으로 강제 합병이 성사되었습니다. 만약 그가 살아있었다면 합병 시기는 늦춰졌거나, 합병 이후 조선인에게 최소한의 자치권이나 타협안을 제시하는 등 형태가 달랐을 수 있습니다.

6. 총독을 임명하고 통제하는 배후의 '최고 권력자'였습니다

당시 일본 제국은 천황 바로 아래에 있는 소수의 원로들(겐로)이 국가의 모든 중대사를 결정했습니다. 이토 히로부미는 그 원로 중에서도 서열 1위였습니다.
  • 조선총독은 천황 직속 기구여서 일본 내각의 간섭을 받지 않는 막강한 자리였지만, 원로인 이토의 영향력 아래에서는 자유로울 수 없었습니다.
  • 실제로 초대 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도 이토가 생전 이끌던 정당(정우회) 및 파벌과의 정치적 역학 관계를 의식해야 했습니다. 이토는 조선총독부의 정책안을 최종 승인하거나 거부할 수 있는 기획자이자 감독관의 위치에 있었습니다. [2]
결론적으로 이토의 생존은 조선총독부의 '지배 목적(식민지화)'은 바꾸지 못했더라도, 그 '지배 방식(무단통치의 잔혹함)'은 크게 완화시켰을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후대의 사이온지 긴모치는 고노에 후미마로와 신세대 일본 장교들의 폭주를 구경만 하다 죽었는데, 이토는 그렇지 않고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을 것이라고 보는 이유는

이토 히로부미와 사이온지 긴모치는 '겐로(元老·원로)'라는 지위는 같았지만, 군부를 통제할 수 있는 '정치적 체급'과 '시대적 배경'이 완전히 달랐기 때문입니다.
사이온지가 군부의 폭주를 막지 못하고 무력하게 밀려난 것과 달리, 이토가 살아있었다면 군부를 강력하게 통제했을 것이라고 학계가 평가하는 이유는 크게 세 가지입니다.

1. 군부 세력(초슈 번)의 최고 대선배이자 '창립자'였습니다

일본 군부의 핵심 세력은 조슈(長州) 번 출신들이 장악하고 있었습니다. 이토 히로부미는 이 초슈 파벌의 독보적인 최고 우두머리였습니다.
  • 이토 히로부미: 당시 군부의 최고 실력자였던 야마가타 아리토모(육군)나 데라우치 마사타케(초대 총독)는 이토에게 있어서 '정치적 동생'이거나 '까마득한 후배'였습니다. 이토는 이들을 사석에서 강하게 호통치고 억누를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이었습니다.
  • 사이온지 긴모치: 반면 사이온지는 구 귀족(공가) 출신으로, 군부에 아무런 혈연·지연적 기반이 없었습니다. 군부 장교들에게 사이온지는 그저 '말 안 통하는 노회한 문관 정객'에 불과했기에 씨가 먹히지 않았습니다.

2. 메이지 헌법을 직접 만든 '시스템의 설계자'였습니다

이토 히로부미는 메이지 제국 헌법의 초안을 작성하고 일본의 근대 국가 기틀을 짠 인물입니다.
  • 군부가 헌법의 허점(통수권 독립)을 악용해 폭주하려고 할 때, 이토는 "이 법을 만든 의도는 그게 아니다"라며 법적·제도적으로 이들을 제압할 수 있는 정당성과 권위를 가졌습니다.
  • 실제로 이토는 생전에 군부가 독단적으로 행동하려 할 때마다 천황의 신임을 바탕으로 군부의 요구를 여러 번 무산시켰습니다.

3. '겐로(원로)' 제도 자체가 강력했던 전성기였습니다

두 사람이 활동한 시대는 원로 체제의 지위 자체가 달랐습니다.
  • 이토의 시대 (1910년대 전후): 이토, 야마가타 등 국가 창업 공신들이 서너 명 이상 살아있던 원로 정치의 전성기였습니다. 군부 역시 이 강력한 원로회의의 통제를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 사이온지의 시대 (1930년대): 다른 원로들이 모두 죽고 사이온지 딱 한 명만 남은 고립무원의 상황이었습니다. 게다가 1930년대는 청년 장교들이 대낮에 총리 등을 암살하는 '테러의 시대(5·15 사건, 2·26 사건)'였습니다. 80대의 사이온지 혼자서 폭주하는 군부를 막기에는 역부족이었습니다. [1]
결론적으로, 사이온지는 군부의 눈치를 보며 수동적으로 정국을 수습해야 했던 '말기 원로'였던 반면, 이토는 군부의 뿌리를 쥐고 흔들 수 있었던 '전성기 설계자'였기 때문에 군부의 폭주를 구경만 하지 않고 실질적으로 제어했을 것이라 보는 것입니다.

 

 

이토 히로부미의 '보호국화' 정책의 구체적 실체, 당시 일본 온건파와 강경파의 조선관 차이

이토 히로부미가 추진한 '보호국화' 정책의 실체는 무력 충돌을 최소화하면서 조선의 국권을 단계적으로 빼앗는 '점진적 병합 시나리오'였습니다. 그는 조선을 단번에 무력으로 강점하기보다, 외교권과 내정권을 차례로 장악해 껍데기만 남긴 후 일본 체제에 서서히 흡수시키는 방식을 취했습니다.
당시 일본 지배층 내부의 '온건파(이토 히로부미 등)'와 '강경파(야마가타 아리토모·군부)'가 가진 조선관의 차이를 비교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이토 히로부미의 '보호국화' 정책의 구체적 실체

이토는 1905년 을사늑약을 강제하여 국권을 빼앗은 후, 초대 조선통감으로 부임해 다음과 같은 구체적인 지배 기틀을 닦았습니다. [1, 2]
  • 단계적 권력 박탈: 1905년 외교권 박탈(을사늑약) $\rightarrow$ 1907년 고종 황제 강제 퇴위 및 군대 해산(한일신협약) $\rightarrow$ 1909년 사법권 및 교도 행정권 박탈(기유각서)로 이어지는 징검다리식 침탈을 진행했습니다.
  • 외교적 명분 중시: 이토는 서구 열강(미국, 영국 등)이 일본의 조선 지배를 정당한 것으로 인정하게 만드는 '국제법적 명분'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 조선인 엘리트 회유: 이완용 등 친일 관료들을 전면에 내세운 '대리 정치'를 펼쳤습니다. 조선인들을 채찍으로만 다스리기보다 교육과 산업을 일으켜 자발적으로 일본 제국의 순응적인 백성이 되도록 유도하는 '문명화(동화) 정책'을 위장했습니다.

2. 온건파 vs 강경파의 조선관 차이

당시 일본 내부의 대립은 조선을 지배할 것인가 말 것인가의 차이가 아니었습니다. "어떻게, 얼마나 빨리 지배할 것인가"에 대한 방법론의 차이였습니다.

요약하자면

이토 히로부미가 이끈 온건파는 '유연하고 세련되게 목을 조르는 방식'을 원했고, 군부 중심의 강경파는 '도끼로 찍어 내리는 방식'을 원했습니다. 1909년 안중근 의사의 하얼빈 의거로 이토가 제거되면서, 일본은 강경파의 각본대로 가장 잔혹하고 급진적인 '1910년대 무단통치'로 직행하게 되었습니다.

 

 

번외편. 이토와 비스마르크

이토가 참가한 이와쿠라 사절단은 유럽에서 비스마르크를 만난 적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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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계에서도 이토 히로부미와 비스마르크의 평행이론은 매우 자주 다뤄지는 연구 주제입니다.
실제로 이토 히로부미는 젊은 시절 독일(프로이센)에 유학하여 비스마르크를 직접 만나 큰 감명을 받았고, 비스마르크가 정립한 국가 모델을 모방해 메이지 일본의 기틀을 짰습니다. 두 인물의 위상과 그들이 정계에서 사라진 뒤 국가가 파멸로 직행한 흐름은 놀라울 정도로 일치합니다.
두 사람의 역사적 평행이론을 세 가지 핵심 요인으로 비교해 볼 수 있습니다.

1. 근대 제국의 체제 설계자 (헌법과 시스템)

  • 비스마르크: 프로이센을 중심으로 분열된 독일을 통일하고 독일 제2제국을 창건했습니다. 황제의 권한을 극대화하되 군부와 의회가 절묘하게 균형을 이루는 시스템을 설계했습니다.
  • 이토 히로부미: 비스마르크 체제를 뼈대로 삼아 메이지 헌법을 초안하고 일본 근대 제국의 기틀을 닦았습니다. 일본에서는 그를 '일본의 비스마르크'라 불렀습니다. [1]

2. 폭주를 막는 최고 수준의 '외교적 브레이크'

  • 비스마르크: 독일의 국력이 강해졌음에도 추가적인 영토 확장을 자제했습니다. 프랑스를 고립시키고 러시아·영국 등과 복잡한 동맹 그물을 짜서 유럽의 평화를 유지하는 '세력 균형(Check and Balance)' 외교의 대가였습니다.
  • 이토 히로부미: 러일전쟁 승리 후 일본 군부가 만주와 대륙으로 미친 듯이 전선을 넓히려 할 때, "일본의 국력은 한계가 있다"라며 제동을 걸었습니다. 영국·미국·러시아와의 타협을 최우선으로 두는 '협조 외교' 노선을 고수했습니다.

3. 이들이 사라진 후, 통제력을 잃은 '제국의 파멸'

두 지도자가 정계에서 퇴장한 방식(비스마르크는 실각, 이토는 암살)은 달랐지만, 그 이후 제국이 걸어간 파멸의 행로는 쌍둥이처럼 닮았습니다.

 

 

시스템이 아닌 '사람'에게 의존했던 한계

결과적으로 비스마르크와 이토 히로부미는 모두 초인적인 개인의 역량과 카리스마로 군부와 강경파를 억누르고 제국의 평화를 유지했습니다.
하지만 "내가 없어도 굴러가는 민주적 시스템"을 만들지 못하고, "나만이 통제할 수 있는 복잡한 권력 구조"를 남겨두었습니다. 그 결과, 그들이 사라지자마자 제국은 통제력을 상실한 채 기관차가 폭주하듯 세계대전과 패망이라는 최악의 파멸로 직행하게 되었습니다.

이 흥미로운 평행이론에 대해 더 깊이 나누고 싶다면:
  • 이토 히로부미가 독일 유학 시절 비스마르크에게 직접 들었던 조언의 내용
  • 비스마르크의 퇴장을 부른 빌헬름 2세와의 갈등 전말
  • 두 나라가 모두 실패했던 '의회 민주주의 정착'의 한계점
어떤 주제에 대해 더 이야기해 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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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까지.

 

이토와 비스마르크, 메이지 일본과 독일 제2제국의 정치에 대한 비교연구 부분은 정말 흥미로운 주제다.

 

나는 지금 일본도 전간기 독일과 비슷하게, 아직 불이 꺼지지 않은 부분이 있다고 생각하거든. 그 근거 중 하나는 야스쿠니 신사다. 정확히 말해 야스쿠니가 품고 있는 위패 문제다. 안치된 당사자의 유족이나 이제 일본이 아닌 나라들의 정부가 요청할 때, 신사가 위패를 선선히 내어줄 수 있을 때가 일본의 국민의식이 정상화될 때라고 본다. 지금 야스쿠니 신사가 하고 있는 짓은, 아이누인 해골을 수집해 전시하던 일본 박물관들의 행태를 떠올리게 한다(그 유골은 지금은 돌려주었다고 알고 있다).

 

만약 다음에 더 깊이 알아보고 싶다면, 챗지피티를 이용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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