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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잉 B-29 폭격기는 1942년 9월 21일 첫 비행, 이후 미국은 1.6만 대 발주 (작성중) 본문

기술과 유행/우주항공

보잉 B-29 폭격기는 1942년 9월 21일 첫 비행, 이후 미국은 1.6만 대 발주 (작성중)

B-29 폭격기는 현대의 폭격기는 물론, 여객기를 비롯한 민항기에도 큰 영향을 준 기념비적인 비행기며 당시 공학의 결정체였습니다. 예를 들어, 이런 종류의 여압 캐빈과 고고도 비행에 맞는 새로운 공학기술을 적용한 폭격기를 양산해보지 못한 영국에서는 전후 세계 최초의 제트 여객기인 코멧을 취역시켰지만, 상용서비스 얼마 후 비행기가 공중분해되는 사고로 단종하고 개량형을 개발해야 했죠. 하지만 보잉에서는 그런 사고없이 보잉 B-29의 설계를 이용해 그대로 프로펠러 여객기를 취항시켰고, 이후 제트 여객기 보잉 B707을 개발해 오랫동안 생산하게 됩니다. 그리고 전시에 일본 폭격 후 연해주 불시착한 것을 데드카피한 소련은 그 계보로 결국 요즘도 사용되는 Tu-95까지 옵니다.

 

그리고, 영상에 따르면, 1944년 4월부터 본격적으로 운용됐다고 합니다. 이후 이 폭격기는 중국에서 일본 본토를 폭격하도록 계획됐지만, 중국에서 준비가 되지 않았고, 폭격을 위해 중국까지 병참지원하는 것은 부담이 매우 컸으며, 아직 실전에서 검증되지 못한 비행기가 공중급유를 받아가며 히말라야 산맥을 넘어가게 하는 것도 부담. 여기에 2만 명이 넘는 인원이 따라가야 했다는 것. 그리고 이 폭격기부대를 보호하기 위한 전투기 부대도 필요.

어쨌든 해야 했기에 1944년 6월 6일 태국 방콕 철도시설폭격을 시작으로부터 동남아의 일본군 목표물을 폭격하는 데 사용. 첫 폭격부터 추락한 기체가 여럿 나왔는데, 현지 지휘관은 B-17과 B-29의 차이를 잘 알지 못했고, 전술도 개량해야 했다.. 이후 인도에서 중국으로 폭격기부대를 보냈고, 중국에서 일본 본토를 야간폭격하기 시작. 각 기체는 2톤씩 탑재. 작전 결과는 아직도 실망스러웠는데, 반을 넘는 정도만 목적지에 도착했고 폭탄은 단 한 개만이 제철소에 명중. 하지만 이 폭탄은 제 역할을 했다.

1944년 가을, 커티스 르메이가 중국을 거점으로 한 제 20폭격기사령부의 지휘관이 됐다. 그리고 이때쯤 사이판을 점령하면서, 사이판에 제 21폭격기사령부가 만들어지고 여기에서도 일본 폭격을 준비.

 

(자세한 수치는 생략)

 

모두 2시간 13분짜리.. 영상 3개가 이어집니다.

B-29 Superfortress against Japan | The Story Of The WWII Bomber, And The Atomic Bomb | Documentary

https://www.youtube.com/watch?v=D8WjJsvqMa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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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29는 이때까지도 엔진의 신뢰성이 만족스럽지 못했지만 가끔 좋은 폭격실적을 냈고, 미국은 큰 기대를 걸었다. 원자폭탄까지도 이 비행기에 달렸다. 

이때쯤 미국은 전술을 바꿔서, 제철소같은 인프라보다 항공산업을 먼저 부수기로 결정.

1944년 미군은 B-29의 정찰버전을 띄워 도쿄 상공을 비행시키며 사진정찰해 사전정보를 수집.

엔진문제, 기체의 완성도 문제는 계속돼서 임무를 포기하는 기체가 속출,

그리고 유례없는 고속비행 중 고공폭격은 명중률이 너무 나빴다.

 

1944년 12월 18일, 중국에 소재한 르메이의 제 20폭격사령부는 일본군의 거점인 한커우에 소이탄 폭격을 했고, 효과는 매우 좋았다. 그리고 이 성공에 자극받은 태평양의 21폭격사령부도 결국 나고야에 대한 소이탄 폭격을 시도. 1945년 1월. 하지만 도달한 항공기도 적었고 효과도 좋지 못했다. 그래서 20폭격사령부 지휘관 핸셀은 그가 반대한 이 작전대신 다시 전통적인 정밀폭격으로 돌아갔지만 여전히 결과는 대체로 나빴고 자신의 입지를 잃었다. 후임이 된 르메이는 핸셀의 방식을 2회 써보고 고베에 소이탄 폭격도 해봤다. 정밀폭격은 적 전투기에 의한 폭격기피해도 심했지만 소이탄 폭격은 만족스러웠다. 이후 추가 테스트를 했고, 45년 2월 도쿄공습은 매우 효과적이었다. 

 

하지만 B-29의 손실은 계속됐다. 현지에서의 일본군 전투기공격말고도, 긴 비행거리동안 연료부족으로 바다에 떨어지거나 기계고장 등의 문제로 손실되기도 했다. 

 

 

유럽과 달리 일본의 대공레이더는 원시적이었고, 대공체계도 미약했다. 즉, 야간폭격하기 좋은 조건이었다.

그리고 일본의 산업인프라는 구획되지 않고 주거지와 섞여있으면서 매우 집중돼있었다.

 

르메이는 비무장 야간 저고도폭격을 시작했다. 방어무장을 내리고 그만큼 폭탄을 더 실었다.

B-29는 일본전투기가 올라오지 못하는 고고도작전이 가능했지만

기술적으로는 아직 그보다 낮은 고도서 날 때 연료소비가 적었고, 엔진트러블도 적었고, 날개의 강성도 저고도에 더 알맞았고, 무엇보다 훨씬 많은 폭탄을 실을 수 있었다. (12천 파운드.. 처음 중국에서 작전할 때는 5천 파운드 근처였다)

 

334대의 폭격기에 2천 톤의 신개발된 M69 네이팜폭탄을 탑재.

1945.3.9일 이륙한 이들은 약 5천~9천 피트의 저고도로 바다를 날아 도쿄에 진입.

폭격은 도쿄의 인구밀집지역을 강타했고 바람은 화재를 부채질. 그동안 효과적이었던 일본의 소방체계는 완전히 무력화됐고, 시가지는 초토화됐다.

 

3.13일의 오사카 폭격때는 레이더를 사용한 폭격으로 훨씬 균일하게 폭탄을 떨어뜨렸다.

 

1945년 4월, 르메이는 휘하에 500대의 폭격기를 갖고 있었고, 이오지마를 점령한 다음 P-51 전투기의 장거리 호위를 받을 수 있게 됐고, 르메이는 130여 대의 손실을 보며 60개 이상의 일본 도시를 불태웠다. 그럼에도 일본 정부는 항복을 거부했고, 작전은 다음 단계로 넘어갔다.

 

맨하탄 프로젝트는 독일보다 먼저 원폭을 만들기 위한 것이었지만, 독일이 항복한 다음인 7월 폭탄 실험을 했고, 이제 그 사용처는 아직 항복하지 않은 일본이 되었다. 당시 트루먼은 스탈린에게 '강력한 새 무기'라고 애매하게 말했는데 스탈린이 더 물어보지 않아 안심했지만 스탈린은 미국에 있는 스파이(K. E. J. Fuchs)를 통해 맨하탄 프로젝트를 이미 알고 있었다.

 

포츠담선언에서 연합국은 일본에 항복을 요구했지만, 일본은 절망적인 패배를 알면서도 인정하지 않았다. "묵살"이라는 외교용어가 아닌 반응[각주:1]은 결국 일본이 응답을 거부했다는 것으로 받아들여졌고, 이후 원자폭탄이 B-29에 통합돼 날았다.

 

원폭 운용을 위해 선발된 지상기술자와 승무원으로 B-29부대(509)를 꾸렸고, 이들은 38차례의 예행연습동안 일본을 왕복했다. 폭격없이 돌아갔으므로 일본의 민간인들에게 매번 그냥 돌아가는 이들은 무해하게 여겨졌을 것이다. 목표는 교토였다. 하지만 트루먼과 스팀슨은 히로시마로 폭표를 바꿨다.

일본은 항복하지 않았고, 두 번째 폭탄은 고쿠라를 목표로 했지만 폭격이 여의치 않아[각주:2] 나가사키에 떨어졌다.

 

(그냥 교토에 떨어뜨렸어야 했어요. 그래야 그 미국인이 생각한 그 교토의 상징성대로, 일본 수뇌부가 폭탄이 일왕의 머리위에 떨어질 수도 있다고 생각할 수 있었을 텐데. 스팀슨이 바보멍청이 와패니즈라서)

 

일본은 결국 정신못차려서, 8월 19일에 가서도 일본에서는 항복이 아니라 포츠담 선언을 받아들인 것이라고 고집피웠다고 저 영상에서는 언급. 원폭 2발을 맞고도 일본에서 항복하지 않자, B-29 역시 공습 재개했는데, 날자마자 일본이 항복. 미군은 일본의 변심을 막기 위해 위력시위를 하며 이제는 폭탄 대신 보급품을 각처의 연합군 포로수용소에 투하.

 

여기까지가 초반 45분 분량.

 

 

이어 시작되는 두 번째 영상은 애놀라 게이 미션을 다룬 것.

당시 히로시마를 폭격한 승무원들의 증언, 대화, 기록.

 

그리고 원자폭탄과 B-29 설명

B-29는 1차대전이 끝나자 미군이 요구하기 시작한 장거리 폭격 프로젝트의 궁극적인 결과물.

개발, 생산 등.

 

운용기간 내내 B-29는 기술적으로 문제가 있었는데, 주로 엔진.

이 엔진은 그 이름철머 프로펠러축의 뒤에 2열로 실린더가 구성돼있었는데, 뒷부분 실린더가 과열되기 쉬웠고 일단 마그네슘 합금이 불붙으면 날개를 태울 정도로 치명적이었다고. 일단 이륙하면 엔진 2개만 있어도 비행할 수 있었지만, 만재중량으로 이륙할 때는 1개라도 고장나면 위험했다나. 그리고 이 폭격기는 전쟁 중 주로 더운 열대지방에서 운용됐다고. 이후 신형 엔진이 개발된 다음에는 해결됐지만 그때는 전쟁이 끝난 다음.

대책은 25시간마다 주요파트 정비, 75시간마다 엔진 교체.

태평양전쟁이 시작횄을 때 XB29는 원형기조차 비행하지 않은 상태였지만 미군의 폭격기 프로젝트에서 유망한 것은 이것말고는 없었다. 이후 어떻게든 개발해서 44년까지 배치.

 

 

B-29의 컴퓨터화된 사격통제시스템. 이것으로 B-29는 다른 폭격기의 수동터릿의 두 배에 달하는 유효사거리를 확보

 

 

Paul Tibbets 와 그의 부대 전기영상?

 

3번째 영상은 1시간 35분 남짓에 시작..

원자폭탄 기폭장치에 관한 이야기 등.

실제 떨어뜨리기 전에 기폭장치(fuze)를 여러 번 실제 조건에서 투하해 기폭시켜봤는데,

때로는 폭탄창떠나서 바로 떨어지는 등 오작동이 잦아 개량하는 데 시간이 걸렸다고.

 

그리고 폭격 당일 미션까지의 준비과정, 당일의 기록.

 

 

 

이것은 모두 1시간 30분 정도 분량. 

Birth Of The American Super Bomber | Upscaled Documentary

https://www.youtube.com/watch?v=_InegQxwbw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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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답정너'? [본문으로]
  2. 목표물이 눈으로 확인될 때만 투하할 것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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