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민번호를 폐지하자는 주장을 보고. 나는 주민번호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디지털시대가 오기 전까진 주민번호는 이렇게 남용되진 않았다. 중요한 업무는 인터넷과 전화를 통하지 않고 직접 출석해야 했으니까. 게다가 관공서나 금융기관말고는, 주민증 복사를 아무나 요구하지도 않았다. 이것이 민번관리가 허술해도 사회문제가 덜 됐던 이유. 하지만 요즘은 인터넷 일처리가 대세인 데다 휴대폰 가입만 해도.. 그래서 민번 유출이 쉽게 됐지만, 민번을 이용하는 일처리 방식은 그걸 따라가지 못해서 구멍이 생겼다. 그리고 결정타가 요 몇 년간 난리도 아닌 개인정보유출사건. 사실, 한국민 전원의 이름 전화번호 주민번호 엑셀 파일이 중국에 돌아다닌다는 말은 오래됐다.

하지만 주민번호를 없애자는 주장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전국민 개개인에 일대일 대응하는 일련번호는 반드시 필요하다. 그것이 주민번호든 아니든 말이다.

세금을 부과할 때, 연금을 줄 때, 여권을 발급할 때, 당신과 당신의 동명이인(성별같고 나이같고 비슷하게 생긴)을 제삼자가 어떻게 구별하나. 뭐? 여권은 아니라고? 민증은 번호가 없어야 하고 여권은 있어야 하는 이유가 뭔데?

농담 좀 섞어서, 지금의 주민번호는 상당히 직관적이고 인간친화적이다. 그래서 문제가 됐지만, 계산기를 써야 하는 100자리 번호로 대체한다 해서 달라질 건 없다. 해킹해서 털리면 컴퓨터 프로그램에게는 지금 주민번호와 똑같이 취급될 테니까.

문제는 주민번호 자체로 열리는 게 너무 많아서 이제는 주민번호를 "열려라 참깨!"대신 써서는 안 된다는 것이지(그리고 이것은 어떤 것으로 대체하든 마찬가지다), 일련번호 자체는 반드시 필요하다. (하나님도 주님의 종 하나 하나를 구별하는 방법은 알고 계실 테다. "척 보면 알지요"라고 말하지는 말자.)

둘째, 이것은 일종의 공개 Key같이 취급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주민번호 13자리는 비록 48비트도 안 되지만, 대한민국 사람에 일대일 대응하기에는 충분하다.

동명이인이 많고, 유일한 이름을 선점하고 죽을 때까지 유지할 수 없는 현실에서, 주민번호는 식별자정도로 취급되고 있는 것 같지 않아? 물론, 그렇다고 뿌려도 좋다는 얘기는 절대로 아니다.

그렇다고 모든 사람에게 USB메모리나 NFC가 되는 전화기에 자기를 대표하는 암호화된 공인인증서를 넣어 다니라고 말하기는 좀 그렇고.. 그냥 자신을 대표하는 숫자로서 외기 쉬운 것하면 딱 주민번호 정도가 아니겠어?

그런 뜻에서 앞으로도 주민번호는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럼 민번에 개선점은 필요없을까... 뒷번호 일곱자리는 바꿀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 이거는 관심있는 사람은 알겠지만, 첫 자리는 성별, 여섯 자리는 등록지, 끝자리는 패리티값 비슷하다고 들었어 (틀렸을 수 있다). 그런데, 공무원이 직접 손계산하던 옛 시대라면 모를까(주민번호는 주판쓰던 시절에 생겼다), 이제는 처음부터 끝까지 전산처리니까 이 부분을 좀 더 랜덤하게 바꿀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가족 주민번호 뒷자리가 다섯 자리나 여섯 자리가 동일한 사람들 있을 거야. 그건 가족이라서 같은 게 아니다.

성별식별에 필요하다면 십진수로 한 자리는 놔두든가. 그건 3비트니까 1비트(남녀)나 2비트(혹은 제3,제4의 성을 인정하게 될 경우를 대비해)를 성별에 할당하고, 1비트는 다른 용도로 쓰든가. 이를테면 이백살을 사는 사람은 있을 턱이 없으니까, 1900년대에 태어난 사람은 그 비트를 0, 2000년대에 태어난 사람은 그 비트를 1, 2100년대에 태어나는 사람은 그 비트를 0으로 하자고 약속하자.

이런 식이다.

ps. 또 하나.

주민번호에 생일이 있기 때문에 싫다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 이것은 정당한 이의제기라 생각한다.

그런데, 13자리 모두 랜덤으로 뽑으면 외기 좀 힘들지 않을까. 지금은 앞 6자리가 생일이라 뒷 7자리만 외면 되고, 20세기에 나온 연구를 보면 7자리는 참 외기 쉬운 번호라서 전화번호도 그렇게 많이 썼다고 하던데. 하긴, 통장번호는 그보다 긴데 외기도 하긴 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