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리 메뉴

PC Geek's

1941년 미국과 전쟁하기로 결정한 일본 어전회의(御前会議|太平洋戦争開戦はこうして決められた) 본문

아날로그/도서,한국사, 세계사 관련

1941년 미국과 전쟁하기로 결정한 일본 어전회의(御前会議|太平洋戦争開戦はこうして決められた)

원래 작년에 적은 글. 업데이트.
원래 NHK다큐멘터리
https://www2.nhk.or.jp/archives/shogenarchives/bangumi/movie.cgi?das_id=D0001200057_00000

 

[NHKスペシャル]御前会議 太平洋戦争開戦はこうして決められた(1)|NHK 戦争証言ア

NHKでは、戦争体験者の証言を中心に後世に戦争の実相を伝えていくために「戦争証言アーカイブス」を公開しています。

www2.nhk.or.jp

番組より、
独ソ戦後の日本の国策原案がどのように作られたのか、その経緯の部分。
독소(전) 전후의 일본의 국책 원안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그 경위의 부분.

番組内容
太平洋戦争の開戦は、1941年(昭和16年)12月1日の御前会議で最終的に決められた。防衛庁戦史部の機密資料や当事者の新証言を軸に、当時の国際情勢を織り込みながら、4回にわたる御前会議を節目に開戦へ進む日本の姿を描く。 語り 
태평양 전쟁의 개전은, 1941년(쇼와 16년) 12월 1일의 어전 회의에서 최종적으로 결정되었다. 방위청 전사부의 기밀자료와 당사자의 신증언을 축으로, 당시의 국제정세를 짜넣으면서, 4회에 걸친 어전회의를 철저히 (다루어) 개전으로 나아가는 일본의 모습을 그린다. 

梶原四郎アナウンサー

 

유튜브 영상 소개:
御前会議 ~太平洋戦争開戦はこうして決められた~|1991.8.15OA昭和16年の7月から12月にかけて、4回の御前会議が開かれた。日本はその4回の御前会議で太平洋戦争の開戦を決断したのである。しかし当時国民はその存在さえ知ることはなかった。御前会議はどのような経緯で開かれ、太平洋戦争の開戦はどのように決められていったのか―

구글 기계번역:
고젠 회의 | 태평양 전쟁 개전은 이렇게 결정되었습니다.
어전 회의 ~태평양 전쟁 개전은 이렇게 결정되었다~| 일본은 그 4회의 어전회의에서 태평양전쟁의 개전을 결단한 것이다. 그러나 당시 국민은 그 존재조차 알지 못했다. 어전 회의는 어떤 경위로 열려 태평양 전쟁의 개전은 어떻게 정해져 갔는지―

출처: https://www.youtube.com/watch?v=Fsf3NZM2pTM


몇몇 인물들의 증언과, 비망록 등 남은 문서를 바탕으로 짚어간 콘텐츠입니다.

御前会議 ~太平洋戦争開戦はこうして決められた~
https://www.youtube.com/watch?v=Fsf3NZM2pTM

石井秋穂(이시이 아키호).. 도조 히데키의 밑에서 개전 논의의 자료를 만든 사람이라는 듯한데요.

쇼와덴노시대의 어전회의란? (일본어 위키백과)

石井秋穂(이시이 아키호) 일본어 위키백과: 위 영상 속 인터뷰의 일부가 나옵니다.


아래 내용은, 제가 틀리게 듣거나 읽은 내용이 있을 수 있습니다. 주의.


우리가 보기에는, 일왕의 책임을 면해주려는 느낌이 다분합니다. 특히 히로히토 '개새끼'(라지만 결국 그것이 한반도 광복의 단초가 됐지만요. ^^)가 메이지 싯구를 나불댄 것으로 개전 책임을 면책받은 것 같은 부분. 그놈도 잠자코 있으면서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다가' 1945년이 되어 자기집만 빼고 도쿄가 불바다되니 결국 권한을 사용했쟎아요. 하여튼 영상에서는, 'XX, 어전회의 이딴 거 다 형식이지 내가 뭘 할 수 있는데' 하며 자신의 무력함을 푸념했다는 기록도 나옵니다.

하지만 저 다큐는, 당시 일본의 정치 제도가 얼마나 꼬여있었는지 알려주기도 합니다.
정치체제는 얼핏 독일 제2제국느낌나게 만들었는데[각주:1], 독일과 일본은 전혀 다른 문화를 가진 나라였죠.
독일은 프로이센시절부터 왕권, 황제권이 아주 강했지만, 독일제국 자체는 비스마르크가 독립주권국을 뭉쳐 통일해서는 왕가를 승격시킨 황가에 바친지 얼마 되지 않았고, 1차대전 종전이 군주정 폐지와 같이 된 걸로 알 수 있듯 종교적으로 신성시하는 대상은 아니었습니다. 독일은 야만적인 나라는 아니었죠.

반면 일본은 20세기에 와서도 일왕을 신앙의 대상으로 숭배했고 그런 경향을 정부가 더 강화했습니다. 그러는, 한편 19세기까지 일본의 권력이 쇼군에게 있었던 것처럼, 소위 '다이쇼 데모크라시'가 끝난 다음에는 권력이 대본영으로 슬금슬금 넘어가고 있었고 그 이유 중 하나가 저런 제도.[각주:2]

그리고 대본영 안에서도 육해군(육군은 참모총장, 해군은 군령부총장)이 하고 싶은 대로 했고, 그 안에서도 관동군과 연합함대는 각각 상급기관인 참모본부와 군령부를 무시하는 왝더독이었고. 그 상황에서 아래와 같은 구도면, 군주는 맹견을 통제하지 못하고 목줄에 끌려가는 개주인꼴이 됐다는 거죠(그렇다고 저런 정치체제에서 군주가 책임을 면제받는다는 건 또 말이 안 되지만요. 그럴 때 모가지내놓을 각오하고 제대로 하라고 제도를 저렇게 만들어 높여주는 게 왕이지).

체제상으로 강력한 권한을 쥔 군주가 대대로 유능할 수는 없기 때문에 어느 나라에서도 그런 일은 발생할 수 있지만, 당시 일본의 경우는 군주도 무능하고 대신도 무능한 상태에서, 군부가 내각대신들은 '암살'해도 아직 "주인(군주)을 물겠다"고 명시적으로 위협하지는 않았지만, 내각과 군주가 그런 분위기에서 알아서 몸사린다 해도 아니라고는 말못하겠는..


그리고 인재풀도 문제였죠.

일단 미국과의 전쟁을 국가시책의 선택지에 넣고 나서야 미국의 국력을 알아보기 위해 정보원을 미국에 파견했다는 말도 나옵니다.[각주:3]

그리고 일본의 군부는 일본인답게, 대국(大局)을 망치고 있으면서도 디테일한 부분에서 국내적으로 책임지기 싫어해 의미없는 데스크웍에 신경썼다는 말도 나오고,

대본영은 자기가 전쟁을 원한다고 노골적으로 주장하지는 않았지만, 외교우선방침[각주:4]을 어전회의에서 정하고도, 일본육해군은 다른 나라에게 매우 공세적으로 이미 움직였습니다. 그러니 외교가 더 망가졌죠.

일본 육군은 독소전초기에 관동군 70만(출처에 따라서는 80만 이상)을 만주에 진주시키면서[각주:5] 당시동부전선에서 한참 밀리고 있던 소련에게 적대감을 높였고,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반도에도 군대를 밀어넣어 비시프랑스정부를 압박해 주둔요구를 관철합니다. 특히 인도차이나반도로 들어간 행위는 당시 바다건너 필리핀을 식민지삼고 있던 미국의 즉각적인 반발을 사 결정적인 경제제재를 불렀습니다.
 
 

(영상 가운데,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의 남부(南部佛印)[각주:6]까지는 남진해도 될 줄 알았습니다. 정말 그때는 왠지, 어떻게 됐는지, 다들 그렇게 생각했어요. 그랬지 않나요? 정말 면목이 없습니다. 면목이 없습니다"는 육성(녹음) 증언이 나옵니다)

 

일본 해군은 해군대로 전쟁준비에 한창이었고, 육군이 눈치볼 때 전쟁밖에 방법이 없다는 주장을 꺼낸 것도 해군[각주:7]은 없으니. 이었다고 하네요. (저 인터뷰한 사람은 육군인사인데[각주:8], 몇 날을 고민하다가 '전쟁밖에 없다'는 결론을 짓고 보고하니 상관이, '(네가 말하지 말고) 기다려 봐라, 그쪽(남방)은 해군의 관심이 더 크니 해군쪽에서 말이 나올 것'이라고 해 기다렸더니 과연 그랬다고) 당시 일본해군은 기름확보에 목숨걸었기도 했고..

그리고 일본 군부의 도조 히데키는 총리가 되기 전에 어전회의에서 명시적으로 전쟁을 주장하지는 않은 모양인데, 전쟁 얼마 전 회의때 내각이 어떻게든 전쟁을 피하려고 이제 먼저 물러나고 미국의 요구를 들어주는 게 좋지 않냐는 늬앙스로 말을 하니까, 도조놈이 한 말이, "외교가 잘 안 되면 전쟁하자는 것은 어전회의에서 정한 일이다. 니가 뭔데 이제 와서 그러냐"며 전쟁밖에 없다는 식으로 몰아갑니다. 머리가 참 단단한 놈...ㅎㅎ[각주:9]

(영상에서는 "어전회의"라는 것을, 대본영과 내각(정부)가 연락회의로 사전조정한 것을 일왕 앞에서 발표하고 일왕의 권위를 빌어 국가시책으로 확정하는 절차라고 했습니다. 그랬지만 전쟁같은 중요한 문제를 논의하면서 책임질 말을 하기 싫으니 어전회의의 권위를 빌어 상대방 입을 막았다는 게 참... 그리고 "일왕의 권위로 확정"이라는 부분이 결국, 제도의 취지는 어쨌든 자기들의 미숙한 행동에 스스로 등을 밀고 책임을 회피하려는 짓이었던 셈이고.[각주:10])


한편 일본 내각도 문제가 많았는데[각주:11].

외무대신 마쓰오카.. 이놈은 사진부터 히틀러닮은 콧수염에 독일추종자. 영화 <야마모토 이소로쿠>의 한 장면에 등장하는 '독일에 지나치게 경도된 젊은 해군장교들'과 같은 사람입니다. 특히 삼국동맹과 일소 중립조약을 맺는 실책을 한 자.[각주:12]
그런 사람들이 꽤 됐는지, 미국과 싸울까하는 논의에서는 일본 육해군 모두 독일이 이긴다고 상정하고 미국과 전쟁할 계획을 말합니다. 일본은 할힌골(노몬한)에서 대패한 뒤에 소련을 극도로 두려워했고 과대평가했는데, 희한하게도 어떻게 미국하고는 그렇게 반사적으로 쉽게 전쟁할 생각을 했는지 모르겠어요. ㅎㅎ[각주:13]

그리고 할힌골전투 이후로 일본은 소련과 그렇게 적대도를 쌓아놓고 어째서 소련은 일본에게 우호적으로 나올 것이라고, 패전할 때까지 착각했는지 모르겠습니다.[각주:14] [각주:15] 일본은 미국이 연해주로 보내는 해상루트 렌드리스를 눈감아준 것으로 소련과 우호관계라고 착각한 걸까요? 어쨌든 스탈린도 그 정도가지고 일본을 믿지는 않았고(당시 조약을 맺은 3국.. 독일 일본 소련은 서로가 서로의 뒤통수를 힘껏 후려쳤는데, 이용할 생각만 머릿속에 가득했습니다) 미군이 단독으로 극동도 밀어버릴 것 같자 이득을 챙기기 위해 중립조약만료 후 1년간의 유예기간을 무시하고 일본군을 공격했습니다.


총리대신 고노에 후미마로..[각주:16] 중일전쟁때 고노에가 한 짓이 중국과 미국에 쌓은 적대감이 너무 커서, 미국 국무부 인사들은 외교면에서 일본을 불신하게 됐고, 미국의 이익은 중국을 지지하는 데 있다고 확신하게 됐죠.[각주:17]
일본정부는 전쟁 전 마지막 시도로 특사를 미국에 보내 미국과의 최고위급 회담을 성사시키려 했다는데, 주일 미국대사는 당시 일본내 분위기가 심상치 않은 것을 잘 알아서 미국 국무부[각주:18]에, 일본의 요구는 어찌됐든 회담건에 대해서는 진지하게 들어달라고 요청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미국 국무부의 브레인들은 이미 일본에게서 돌아서버려서, 미국 국무장관과 대통령이 장제스의 협상반대주장을 더 중시하도록 했다고 하네요.[각주:19] [각주:20]큰 이유는 중일전쟁에서 일본이 손뗄 의사를 표명하지 않고 회담을 요구한 것이 또 하나의 기만에 불과하다는 판단이겠지만, 영상에서는 다른 이유로, 중일전쟁을 그런 상황까지 만든 주모자로 지목된 고노에를 대표로 보내겠다 해서 더 감정을 상해 거부했다는 말도 나옵니다.[각주:21] [각주:22] [각주:23]

영상 끝에서 증언자는 "침략사상이 있었다"고 말합니다. 다른 이유를 달기 전에, 바탕에 있었던 그것때문에 결국 전쟁을 시작했다고. 사실 영상을 보면 4차례의 어전회의와 나머지 회의 내내, 어떻게 미국의 제재를 물리고 중일전쟁을 계속할까만 궁리하지, 일본이 그때까지 점령한 곳 어디를 포기하거나 어디서 철수하거나 서태평양에서의 이권을 조금이라도 미국에게 내주면서 대미관계를 개선해 미일전쟁을 피할까는 진지한 논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항아리 속 열매를 한 움큼 쥐고는 놓을 생각을 못해 손을 못 빼서 신세망치는 원숭이하고 비슷하게요.



ps.

이건 제 생각인데, 만약 당시 일본이 중일전쟁즈음부터 들어간 중국 본토에서 전면 철수하고 만주국의 종주권을 주장하며 상하이를 홍콩과 같은 식으로 지배하며 다른 서구권 국가에게도 개방하겠다고 절충안을 내놨다면 미국은 어떻게 반응했을까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그 가정하에서 어쩌면 미국은 그것을 일본의 양보로 받아들일 수 있었을지도 모르고, 만주에 대한 일본의 지배를 공인하지는 않아도 유럽전쟁이 끝날 때까지는 묵인할지도 모르고, 최소한 석유 금수는 풀어줄지도 모르죠. 그러면 우리 광복은 요원해지겠지만 어쨌든 저 부분만 보면.

혹자는 "중국이 안정되면 결국 일본과 다시 붙고 일본이 이기지 못할 것" 운운하지만 그건 아닐 가능성이 큽니다. 그 정도 판도를 가진 일본이면 국공내전을 이이제이하는 정도로도 중국의 발목을 잡고, 그때까지 확보한 식민지와 신탁통치지역을 개발해 국력을 키울 시간을 확보할 수 있을 테니까요.

그리고 종전 후 소련에 대항하는 냉전기가 도래하고 국민의 염전사상이 커지면, 미국은 일본을 손봐주기보다 한 편으로 끌어들이고싶어할지도 모르죠.



  1. 이와쿠라 사절단이 세계를 돌았을 때, 비스마르크를 만나 대화한 적도 있기는 합니다. [본문으로]
  2. 정치제도를 군부영향력이 강해지도록 옛날식으로 퇴보시키기도 했고요. [본문으로]
  3. 일본해군이 하룻밤 벼락치기로 자료를 뒤져 1차대전때 영국 수송선 손실량을 찾아 인용했다거나, 당시 일본의 경제부처에서 일본 미국 경제력 비교표를 급조했다는 얘기는 유명합니다. 해군은 감당할 수 있다는 주장의 논거로 그걸 썼다고 하고, 경제부처의 실무자는 이건 게임이 안 된다고 생각했지만, 그 부처의 대표자는 어전회의에 나가서, 육해군이 이렇게 말했으니까 그럴거다. 경제담당으로서는 '그러니까 하려면 지금밖에 없다'고 말해버리는 식. .. 어전회의 분위기에서 그 고점찍고 내려가는 일본 경제통계가 하지 말아야 할 이유가 아니라 하려면 지금이라는 논거로 이용됐습니다.. [본문으로]
  4. 외교를 먼저 한다고는 했지만 좀 다른데, "이렇게 압박받으면 군부는 전쟁을 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 전에 내각이 외교로 풀 수 있으면 해봐라"란 느낌. [본문으로]
  5. 독일군이 1941년 가을의 기세를 유지하며 소련이 망가지면, 일본은 그 소련을 뒤통수쳐 연해주와 시베리아를 먹겠다는 생각이었다고 합니다. 이 병력은 태평양전쟁이 시작되며 중국, 인도차이나, 태평양섬지역으로 빼가지만요. [본문으로]
  6. 왜 남부냐 하면, 북부 인도차이나까지는 이미 들어가있었거든요( 왜냐 하면 인도차이나반도 북부의 항구를 통해 중국으로 들어가는 미국의 지원을 막기 위해서. 이걸 막음으로써 장제스정부에게는 버마루트만 지원통로로 남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거기까지는, 그것도 대미관계가 악화일로로 돌아가는 데 일조했지만 일본이 양자택일을 강요당하는 수준까지는 아니어서 외교의 가능성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가운데, 내각이 최후의 외교적 수단을 모색하는 가운데 군부는 남부까지 내려가버려서 필리핀을 마주보게 된 겁니다. 당시 필리핀은 이전의 미국-일본간 협의독립 직전의 자치정부상태였습니다. 그래서 미국은 필리핀도 위험하다고 생각한 것. [본문으로]
  7. 중일전쟁이 안 풀려 고생하던 일본 육군은 중일전쟁에만 집중하고 싶어했습니다. 반면 일본 해군은 이제 아시아에서 맞수가 미해군밖에 없었고, 군함은 기름퍼먹는 하마였으며, 미국은 일본에 기름을 금수했고 동남아 유럽 식민지들도 일본에 기름을 팔지 못하게 했습니다. [본문으로]
  8. 어전회의에서 안건의 우선순위를 정한 것이 자기였다고, "죄가 깊다"며 자책합니다. 그가 어찌했든 육해군은 중일전쟁까지 손에 쥔 해외판도를 내놓을 생각은 전혀 없었기에 전쟁을 했겠지만. [본문으로]
  9. 그런 도조지만 전쟁 중에 수송선을 대량 손실한 상황에서 군부가 남방작전을 위해 더 많은 수송선을 재차 요구하자, "그랬다가는 (전쟁을 떠받치는 민간경제를 운영할 수 없어) 나라가 파산한다"며 거부했다가 회의장에서 육군에게 "삐가야로(멍청이)"소리를 듣기도 했다고 합니다. 도조도 육군 출신이고 계급은 훨씬 위인데.. 더한 놈도 있었다는 말. 저쟁 말기에 도조가 정부와 군의 고위직을 겸임한 데는, 조직이 총리대신말을 안 들으니까 그 조직의 장도 자기가 했다는 평도 있습니다.. [본문으로]
  10. 그런데 그러면서도 일왕이 완전한 허수아비는 또 아닙니다. 예를 들어, 전쟁 전 쿠데타때는 멋대로 자기 권위를 빌려 사고친 황도파 장교들에게 화난 일왕이, 진압에 미온적인 육군장성들에게, "너희들이 안 하겠다면 내가 근위사단을 지휘해서 저것들을 다 쓸어버리겠다"고 펄펄 뛰어서 그들을 반역도로 규정하고 진압하도록 관철시켰다고 하죠. 그리고 1945년 8월 14일의 의사결정때도, 이미 끝장났는데도 자기를 핑계로 항전주장하는 군부때문에 공전하던 회의를, 그만 하고 항복하라 해서 입다물게 했다는 이야기하며. "어전회의에서 일왕은 주로 입다물고 시청하고 시종장(기도 고이치) 이 대신해서 말한다"는 그들 관행을 '일왕이 권한이 없어 책임이 없다'는 뜻으로 읽을 수는 없는 이유. [본문으로]
  11. 마치 1910년대 독일 제2제국처럼, 이토 히로부미와 사이온지 긴모치시대의 교활한 사람들은 퇴장하고 그들이 잘못 고른 후진들이 망치고 있었다는 인상이 팍팍 드는 부분. [본문으로]
  12. 일본은 독일-이탈리아와 삼국동맹을 맺은 처지였는데, 일본이 미국과 전쟁하기 전에 후방을 든든하게 하기 위해 소련과 중립조약을 체결하기를 바랐으며, 일본이 '조정자적 위치'(그렇게 착각한 것이죠)에서 불가침조약상태인 독일과 소련을 묶으려고 했다고 합니다(그래놓고는 나중에 독소전이 벌어지자 일본은 독일이 이기면 한몫챙기려고 관동군을 증파했습니다). 그런데 중립조약체결 직후 독일이 소련을 침공하면서 그런 구상은 박살났고, 마쓰오카는 그 책임을 지는 형식으로 물러났다고 하네요. 그런데, 일본 정부의 성질은 바뀌지 않아서, 이후에도 일본이 독일과 소련의 화해를 중재한다거나, 일본을 위해 소련이 미국을 움직여줄 것이라든가하는 기대(과대망상)를 깔고 외교를 했다고 합니다. [본문으로]
  13. 그리고 주독 일본대사도 비슷한 인물로 독일의 선전(프로파간다)을 본국에 전달하는 정도밖에 못한 무능한 사람. 당시 독일주재대사면 국제연맹에서 탈퇴한 일본의 유럽외교 중심이었을 테니 더 문제. [본문으로]
  14. 독일'빠'가 많은 거야 마쓰오카 등이 전쟁 전에 외무관료진을 갈아엎은 탓도 있다지만, 소련쪽은 왜? 리하르트 조르게라도? 어쨌든 일본 본국의 외무관료와 군부 수뇌부는 주어진 정보도 무시해 소련과 독일에 대해서도 오판을 거듭했습니다. [본문으로]
  15. 노몬한사건이라고 축소한 할힌골전투 이후 일본육군은 소련군을 크게 두려워한 것 같고, 독소전 초반 관동군을 증강시킨 것은 독일과 공조하려는 일본외무성의 의도도 컸다는 얘기도 어디서 보기는 했는데 잘 모르겠네요. 하여튼 전쟁말기가 되어 관동군의 알짜를 대륙타통작전에 소모한 다음쯤 되면, 일본육군은 소련하고 싸울 가능성 자체를 '생각하기를 그만두고' 안이한 희망에 의지한 것 같고, 일본해군은 만약 소련하고 얘기가 잘 되면 기름 좀 얻자는 언감생심이었다고 합니다. 그게 어전회의때 분위기로, 미국하고는 한 번 크게 싸워서 이기면 그 다음에는 뭐가 어떻게 돼도 좋아! 다 죽어도 좋아! 하면서 소련에게는 제발 친하게 지내자고 말좀 해봐.. 이랬다고. [본문으로]
  16. 막후 실력자 사이온지 긴모치의 후원을 받아 정계 거물이 된, 가문과 학벌, 경력 모두 '엄친아'라서 촉망받던 신세대였고, 청년시절에는 일왕의 권위를 가볍게 여긴다는 평에 언론쪽에도 손대서 다이쇼시대 분위기에 어울리는 자유주의자로 오해하기도 했다는 모양이지만, 사이온지가 실의에 빠져 세상을 뜨게 한, 당시 일본을 망친 원흉(이자 한반도 독립유공자?). 독일로 치면 비스마르크를 내치고 영국과 경쟁하려던 빌헬름 2세시대 신세대같은 느낌? [본문으로]
  17. 그런데 이 영상을 보고 위키백과를 읽어보니, 적어도 고노에 내각의 반미/반소/친독정책은 상당부분 외무대신 마츠오카와 관계있다는 말도 보였습니다. 그 고노에가 놀랄 정도로 미국을 미워해서, 마츠오카를 자른 것도 고노에라나. [본문으로]
  18. =다른 나라의 외무부 [본문으로]
  19. 다만, 미국 정부, 의회, 미군이 조만간 일본과 충돌할 것을 예상하기는 했지만, 미국내 여론은 고립주의가 매우 강해서 미국은 영국의 거듭된 요청에도 불구하고 유럽전선에도 참전하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본문으로]
  20. 일본이 진주만을 침으로써 미국내 반전여론이 일소되었고, 이것을 호기라고 생각한 독일이 먼저 미국에 선전포고함으로써 영국은 한시름 놓았고 미국 정부는 국민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아 양 대양의 전쟁을 시작하죠. [본문으로]
  21. 웃기게도 고노에는 1945년에 스탈린에게 보낼, '미국과의 종전을 소련이 중개해달라'는 외교특사로도 다시 임명됩니다. 그리고 소련도 고노에 파견에 호의적이지 않았습니다. 소련은 이미 얄타회담에서 "독일항복 두세 달 뒤 일본을 치겠다"고 약속해서 열심히 전쟁준비 중이었으니, 시간끌기로 확답을 안 줍니다. 그리고 일본은 갈팡질팡했다죠 [본문으로]
  22. 얄타회담에서 소련이 한 일본공격약속에 대해 일본이 완전이 깜깜이였냐고 하면 또 그렇지는 않았습니다. 당시 스웨덴에 주재하며 현지 첩보망을 운영하던 무관 오노데라 마코토 중좌가 그 내용을 그대로 본국에 타전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결국 그 정보는 본국의 의사결정에 반영되지는 못했죠. 오노데라는 독소전 초기부터 전쟁말기까지 국제관계를 보는 눈이 정확한 편이었다는데, 어째서인지 일본의 운명을 좌우하는 중요한 갈림길 - 태평양전쟁 시작부터 끝을 결정한 외교, 군사분야 결정 - 에서 그가 보낸 중요한 정보와 판단들은 본국에서 매번 무시해버린 셈이 됐습니다. 히틀러가 동양에 충성스런 '빠돌이' 하나는 참 잘 뒀죠. [본문으로]
  23. 그리고 여기서, 일본이 전쟁을 시작하게 만든 원흉 중 고노에 후미마로와 나란히 세울 만한 외무대신 마츠오카 요스케가 만든 폐단이, 전세를 오판하고 외교를 오판하게 하는 결정적인 원인으로 작용했습니다. 마츠오카는 자기가 외무대신일 적에 독일과의 동맹을 반대하는 외무관료 40여 명을 경질하고 친독파로 교체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자신도 삼국동맹과 일소중립조약을 이끌었다가 결국 밀려났죠. 문제는 마츠오카가 일신한 그런 분위기에서, 전세를 독일에 유리하게 오판해 수뇌부에 전달하는 관료들이 자리를 잡았다는 것. 오노데라의 독소전 전황보고도 그랬는지는 모르겠는데, 적어도 후일의 얄타회담 일본관계사항과 소련관계정보, 그리고 독일패망 후 끝없이 북만주로 집중되는 소련군 전력이동 첩보(이건 주소련 일본대사도 보냈습니다)를 담당자들이 고위층에 전달하지 않고 무시한 것 등.. 당시 일본에게는 불운이었죠. 전후 그 중 한 사람이 남긴 기록내지 변명을 보면, "관료로서 나는 이런 정보는 무시하는 게 맞다고 생각했다"라나.. 웃지 못할 일입니다. [본문으로]
이 글과 같은 분류글목록으로 / 최신글목록 이동
Comments
Viewed Posts
Recent Comments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