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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1700년대) 초 조선시대 주막에서 결제는 뭘로 했을까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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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1700년대) 초 조선시대 주막에서 결제는 뭘로 했을까

네이버 지식백과입니다.


18세기, 세계 도시를 걷다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3434407&cid=58463&categoryId=58463

서울의 술집

술꾼으로 흥청망청한 18세기 서울의 술집 풍경

[네이버 지식백과] 서울의 술집 - 술꾼으로 흥청망청한 18세기 서울의 술집 풍경 (18세기, 세계 도시를 걷다, 안대회)


  • 1766년경 종로에서 청계천쪽 가까운 곳에 이름만 대면 누구나 아는 유명한 술집 군칠이집이 있었다 (...) 그로부터 100년 뒤 한양에서 군칠이집은 술집을 가리키는 일반 명사로 쓰였다.
  • 말단의 이익을 추구하는 방법으로는 양조업이 가장 많고, 양조하는 곳은 경성(京城)이 가장 많습니다. 지금은 골목이고 거리고 술집 깃발이 서로 이어져 거의 집집마다 주모요 가가호호 술집입니다. 그러니 쌀과 밀가루의 비용이 날마다 단위로 헤아리고(...)
  • 1728년 형조판서 서명균(徐命均)이 영조에게 보고한 내용에서도 (...) 여염집에서 주사(酒肆)가 10중 7 내지 8이 되고 그들이 빚는 술의 양이 많게는 100여 섬[斛]이고, 아무리 적어도 6, 70섬 아래로는 내려가지 않는다고 하였다 (...) 금주령의 실시를 주장하기 위한 목적이 있기에 과장이 상당히 가해졌다고 보는 것이 옳다. 그래도 (...) 술집의 숫자가 지나치게 많다는 생각은 특정한 사람이 아니라 다수가 공유하는 의견이었다. 성호(星湖) 이익(李瀷) 역시 『성호사설』에서 큰 거리의 상점 가운데 절반이 주점임을 개탄하고 있다
  • 한양에서는 깃발보다는 등(주酒등)으로 술을 파는 곳임을 표시
  • 김약로: 근래 주등이 대궐문 지척에 퍼진 정도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경성 내외로 말씀 드리면 열에 여덟아홉이 술집입니다. 영조: 때때로 대궐 안에서 높은 곳에 올라가 멀리 바라보면 주등이 대단히 많다. 그렇다고 그 점을 민망히 여겨 금주를 실시한다면 삼사(三司)의 아전 놈들이 여항에서 폐단을 일으킬 테니 이것이 난처하구나. - 승정원일기
  • "18세기에 금주령이 그렇게까지 문제가 된 이유는 그만큼 조선 사람이 술을 많이 마신 데 있다. 18세기 살인사건의 동기로 음주는 치정과 관련한 동기 다음으로 많았고, 음주로 인한 사망사고도 적지 않았다. 남녀노소 따질 것 없이 술을 즐겼고, 아동도 열 살 이전부터 술을 마시기 시작하였다."

그 외 당시의 술집문화(술문화가 아님)이야기가 나옵니다.

출처:
18세기, 세계 도시를 걷다 - 백진 외 25인
한국18세기학회가 세계 각 지역 전문의 인문학자를 초청하여 18세기 동서양 도시를 구석구석 안내한다. 도시라는 공간과 그곳에 모여든 사람들, 그리고 그들이 만들어낸 문화를 두리번두리번 산책하며 도시가 새롭게 만들어낸 인간과 사회에 대해 알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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