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리 메뉴

PC Geek's

2차대전 태평양전쟁, B-29 폭격부터 이오지마, 오키나와, 원폭, 종전까지 본문


아날로그/도서,한국사, 세계사 관련

2차대전 태평양전쟁, B-29 폭격부터 이오지마, 오키나와, 원폭, 종전까지


반응형

미국에서 만든 다큐멘터리는 전에 한 번 요약한 적 있습니다.

이번에는 일본관점에서 다룬 일본다큐.

 

 

【実録映像】 太平洋戦争10 / 沖縄、そして終戦

마리아나(사이판과 괌을 포함한 마리아나제도)에서 출발하는 경로가, 중국 내륙에서 출발하는 경로보다 훨씬 짧고, 지속적인 폭격을 위한 보급도 쉽다.

 

당시의 B-29 폭격기는 완전한 성능이 아니었기 때문에, 중간쯤에 비상활주로가 있으면 손실을 크게 줄일 수 있었다. 그리고 고고도 폭격은 일본상공의 제트기류로 인해 명중률이 낮았으므로 중저고도 폭격을 했는데(저고도 폭격일 경우 폭탄적재량도 크게 늘었다), 이때는 호위전투기가 반드시 필요했다. 이를 위해서도 이오지마(유황도)가 필요했고, 일본군의 조기경보체계를 무너뜨리기 위해서도 필요했다.

 

 

그리고 오키나와. 본토공략을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베이스.

 

 

https://www.youtube.com/watch?v=XobI-IUL6CI

.

.

.

.

.

 

포츠담선언에 소련이 없었기에[각주:1] 일본은 소련이 일본에 호감이 있다고 착각

트루먼은 전후 소련의 극동영향력 확대를 우려해 대일전을 빨리 끝내고 싶어해 포츠담 선언을 했고 한편으로 원폭을 준비시킴

소련은 극동영향력 확대를 위해 사령부를 신설하고 유럽에서 병력과 무장을 끌어와 침공 준비

 

(재미있는 이야기가 더 나오는데 나중에 시간나면.)

 

일본은 히로시마 원폭을 맞은 다음

소련침공소식을 듣고

=========================================

모스크바 시간으로 8월 8일 오후 5시, 소련에게 대미협상중재를 요청하러 간 주소 일본대사는 "내일 만나러 갑니다"하는 소련의 선전포고를 들었다.

소련은 8월 9일 0시부로 국경을 넘어 만주를 침공했고, 선전포고는 04시에 라디오로 방송됐고, 일본 정부는 이 방송을 수신할 수 있었다.

( 소련의 선전포고시각과 침공시각, 방송시각이 표준시가 같은지는 찾아볼것.  현재는 모스크바 표준시는 UTC+3시고, 일본 표준시는 UTC+9시로, 일본시간이 모스크바시간보다 6시간 빠르다. 따라서, 모스크바시간 8일 17시는 도쿄시간 8일 23시다. 침공시각인 8월 9일 0시는 작전개시시각인 만큼 만주 현지시각일 것이다. 그럼  소련은 침공 1시간 전에 선전포고한 건가? 마치 일본이 진주만공습할 때 30분인가 남겨놓고 선전포고하려 했던 것처럼? 일단 당시의 표준시가 지금과 같은지 그리고 실제로 어땠는지는 확인해볼 필요가 있다 => 대충 맞는 것 같다.)

=========================================

 

긴급 최고전쟁지도회의를 8월 9일 오전 10시반에 열었는데

바로 그때 나가사키 원폭 소식을 들음.

(이제 2번째다. 그럼 3번째도 있지 않을까?)

 

하지만 이 상황에서도 포츠담선언을 수락할지 여부를 두고 설왕설래

10일 오전 2시. 일왕이 국체존속만을 조건으로 수락 결정. 

미군은 일왕과 일본정부가 연합군최고사령관에게 예속된다고 답신.

일본 수뇌부는 이 의미가 뭐냐며 또 설왕설래.

그렇게 닷새를 허비하다

8.14일 어전회의에서 일왕이 결론지음. 그리고 15일 항복방송.

 

일단 여기서는 이렇게 이야기.

 

(여기까지 보면, 소련이 침공해서 일본이 항복한 것은 아니다.

1번 원폭을 맞고 

소련의 선전포고를 듣고

소련군 침공소식을 듣고

2번 원폭을 맞고

 

그러고도 항복할지 결사항전할지를 설왕설래했다.

일왕이 전쟁을 시작한 공범이 맞지만,

전쟁을 끝내는 데 역할을 한 것도 맞는 듯.

 

저 녀석들은 정말로

3번, 4번, 5번 원폭도 맞고,

소련군이 홋카이도를 먹고 한반도 남부까지 내려오고[각주:2]

미군이 큐슈와 시코쿠를 먹고 관동에 상륙할 때까지도

광분했을지도 모르겠다.)

 

 

ps.

몇 가지 고쳤다.

 

 

 

 

  1. 당시는 일소중립조약이 발효 중이었으므로 소련이 일본에게 항복을 요구할 수는 없는 게 일단 자연스럽다. 한편 카이로 선언은 미영중만의 회담 결과였고, 미영소가 참가한 얄타 회담의 결정 사항은 추축국을 향해 공개 선언한 적이 없다(일본의 경우, 그 내용이 첩보로 본국에 전달되기는 했지만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고 무시됐다). [본문으로]
  2. 한반도를 침공한 소련군은 북만주에서 내려온 것이 아니라 블라디보스톡에서 건나왔다. 그래서 한반도 북부는 소련의 선전포고 당일 이미 공격받았고, 소련군은 8월 9일에 국경을 넘었다. [본문으로]
반응형
이 글과 같은 분류글목록으로 / 최신글목록 이동
Comments
more

Viewed Posts
Recent Comments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