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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사 명장면 (매일경제, 임기환 서울교대 사회교육과 교수) 본문

아날로그/도서,한국사 관련

고구려사 명장면 (매일경제, 임기환 서울교대 사회교육과 교수)

2016년 6월부터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연재입니다. 고구려멸망 후 보장왕의 말년까지 이야기했으니 끝이 아닐까싶은데, 워낙 오래된 연재인데 어디까지 갈지 봐야겠군요. 이제 분량이 엄청 많은데 무척 재미있습니다.

 

https://www.mk.co.kr/premium/series/20088/

 

매경프리미엄기획연재고구려사 명장면

 

2021


신라는 나당전쟁에서 승리했는가? (2)
12.23 15:18
[고구려사 명장면-139] 한국사 교과서에는 나당전쟁에 대해서 675년 매초성(買肖城) 전투, 676년 기벌포 전투에서 신라군이 당군을 격퇴함으로써 나당전쟁을 신라의 승리로 종결시킬 수 있었다고 기술하고..

신라는 나당전쟁에서 승리했는가? (1)
12.09 15:31
[고구려사 명장면-137] 한반도에서 한성고구려국을 중심으로 하는 고구려 부흥세력은 670~673년 4년 동안 당군과 치열한 전투를 치렀으나, 끝내는 평양 이남의 세력 기반을 모두 상실하고 임진강을 건너 ..

보덕국의 소멸과 회한
11.25 15:01
[고구려사 명장면-137] 674년 8월, 문무왕은 안승을 보덕왕(報德王)으로 다시 책봉하였다. 670년 8월 1일 안승을 '고구려왕(高句麗王)'으로 책봉한 지 꼭 4년 만이다. '보덕(報德)'은 신라 문무왕의 덕(德..

약자가 선택한 전쟁, 약자를 배신한 전쟁 - 나당전쟁
11.11 15:01
[고구려사 명장면-136] 나당전쟁에 관련한 일련의 연구를 진행한 서영교 교수는 나당전쟁을 다룬 저서에 "약자가 선택한 전쟁"이라고 이름 붙였다. 나당전쟁이 갖는 핵심의 하나를 잘 드러낸 제목이라고 ..

신라는 왜 고구려 부흥군을 지원하였나?
10.28 15:01
[고구려사 명장면-135] 고구려의 멸망과 부흥 전쟁에 대해 고구려인이 남긴 기록이 전무한 상태에서 그나마 약간의 면모를 확인할 수 있었던 것도 신라인의 기록 덕분이다. 이런 기록이 남게 된 이유는 신..

안승은 왜 검모잠을 죽였나? - 고구려 부흥전쟁 (6)
10.14 15:14
[고구려사 명장면-134] 한국사 교과서를 배울 때 백제 부흥운동이나 고구려 부흥운동을 공부하며 분통 터졌던 대목이 있다. 백제 부흥운동에서 주역이었던 복신이 도침을 살해하고, 또 왕자 풍이 복신을 ..

설인귀서와 답설인귀서
09.30 15:01
[고구려사 명장면-133] 671년 7월 26일, 당나라 계림도총관 설인귀(薛仁貴)가 임윤법사(琳潤法師)를 시켜 신라 문무왕에게 편지를 보내왔다. 이를 '설인귀서(書)'라고 하는데 일종의 외교문서라고 할 수 ..

한성 고구려국의 재건 - 고구려 부흥전쟁 (5)
09.17 06:01
[고구려사 명장면-132] 한 나라와 왕조가 정복당하고 멸망하였을 때, 대부분 그 나라를 재건하고자 하는 부흥운동이 일어나게 마련이다. 이런 부흥운동은 여러 이유로 나타나겠지만 대체로 그 나라 지배층..

안승과 검모잠의 한성 고구려국 - 고구려 부흥전쟁 (4)
09.02 15:01
[고구려사 명장면-131] 한국사 교과서에서 고구려 부흥운동에 대한 서술을 보면 단지 안승과 검모잠이 등장할 뿐이다. 관련 문헌 자료가 워낙에 얼마 되지 않기도 하지만, 그나마 이 두 인물에 대한 기록..

고연무와 오골성 전투-고구려 부흥전쟁(3)
08.19 15:05
[고구려사 명장면-130]고구려 멸망 및 부흥전쟁과 관련해 신라본기에는 당이 남긴 기록에서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독자의 기록을 상당수 담고 있어 그 사료적 가치가 매우 크다. 본 연재에서도 신라본기..

이타인(李他仁) 대 고정문(高定問) - 고구려 부흥전쟁 2
08.05 15:59
[고구려사 명장면-129] 고구려 멸망 후 그 유민들의 삶을 전하는 문헌 기록은 거의 없다. 그런데 근래에 중국에서 고구려 유민들과 그 후손들의 묘지명이 20여 종 발견돼 학계에 보고되고 있다. 당에서 수..

나라가 망했을 때, 그 나라 주민들이 겪어야 할 상황은 어떠하였을까?
07.22 16:50
[고구려사 명장면-128] 역사에서 수많은 나라가 멸망했기 때문에 이런 질문은 끊임없이 묻게 된다. 여기서 나라가 망했다는 경우는 한 사회 내부의 왕조 교체가 아니라, 외부 세력에 의해 정복 내지 점령..

 

큰 배신으로 얻은 작은 부귀
07.08 17:30
[고구려사 명장면-127] 나라가 멸망할 때에 국운과 개인의 영화를 맞바꾼 자들은 어느 시대 어느 나라에도 있는 법이다. 그 나라의 통치 권력이 공공성을 잃고 사리사욕에 급급하면, 지배층에서는 언제든..

 

망국 후에 군주 노릇을 한 보장왕
06.24 16:41
[고구려사 명장면-126] 668년 9월 당 고종은 고대하던 평양성 함락 소식을 듣고 10월 2일에 궁중에서 문무관원을 불러모아 큰 연회를 베풀며 고구려 정복을 축하하였다. 이때 구부악(九部樂)을 연주하게 ..

무너지는 고구려 (6) - 평양성 최후 전투
06.10 15:01
[고구려사 명장면-125] 9월 21일 고구려 평양성이 함락된 후 군대를 이끌고 귀환한 문무왕은 11월 5일에 서라벌에 도착하였다. 그런데 그 이전인 10월 22일에 문무왕은 고구려와의 전투에서 공을 세운 인..

무너지는 고구려 (5) - 잊힌 압록강 전투를 찾아내다
05.27 15:01
[고구려사 명장면-124] 중국 사서인 '자치통감'에는 고구려 평양성의 최후 모습을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668년] 9월 계사일(12일)에 이적이 평양을 함락시켰다. 이적이 대행성(大行城)에서 이기..

무너지는 고구려 (4) - 마지막 나당연합
05.13 17:50
[고구려사 명장면-123] 당군은 668년 정월부터 원정군을 충원하고 본격적인 고구려 공략에 나섰다. 당 고종은 우상(右相)인 유인궤(劉仁軌)를 요동도부대총관(遼東道副大總管)으로 삼아 이세적과 함께 원..

무너지는 고구려 (3) - 667년 마지막 겨울나기
04.29 16:50
[고구려사 명장면-122] 667년 9월 14일에 고구려 신성(新城)을 손에 넣은 이세적은 군대를 나누어 자신은 압록강 쪽으로 남하하고, 글필하력은 국내성으로 가서 남생군과 연합한 후 압록강 쪽으로 진군하..

무너지는 고구려 (2) - 압록 이북 방어망이 뚫리다.
04.15 15:01
[고구려사 명장면-121] 667년 9월 14일에 고구려 서북 최대의 거점성인 신성(新城)이 당군 손에 들어갔다. 이세적 군이 8개월이나 공격해도 함락시키지 못했던 신성이 내부 반란으로 결국 당군에 투항한 ..

무너지는 고구려 (1) - 신성 함락
04.01 16:01
[고구려사 명장면-120] 666년 5월 남생이 아들 헌성을 당의 조정에 인질로 보냄으로써 당의 조정도 비로소 남생의 투항이 진심임을 확신하게 되었다. 고구려 정벌을 포기하고 있던 당 고종은 희색이 만연..

남생은 왜 당에 투항하였나?
03.19 15:01
[고구려사 명장면-119] 666년 6월 고구려 태막리지 남생(男生)의 아들 헌성(獻誠)이 당의 조정에 도착했다. 헌성이 당에 온 목적은 아버지 남생의 투항 의사를 전하기 위해서였다. 남생은 이미 직전에 측..

연개소문은 언제 사망하였나?
03.04 16:47
[고구려사 명장면-118] 666년 정월 당 고종의 태산 봉선 의례에 고구려 태자 복남이 참여한 것은 고구려와 당 사이 관계가 이제까지 적대적·군사적 대결에서 상호 우호적인 관계로 바뀔 수 있음을 보여주..

고구려 태자가 당의 태산 봉선의례에 참가한 이유는?
02.19 06:01
[고구려사 명장면-117] 665년 10월 24일 고구려 보장왕의 태자 복남(福南)이 당의 낙양에서 당 고종을 조회하였다. 662년 3월에 소정방의 대군이 평양성 공격에 실패하고 참담한 패배를 안고 돌아간 지 불..

평양성 전투 (3) 연개소문 대 소정방 대 김유신
02.04 15:01
[고구려사 명장면-116] 외형상으로는 당군이 평양성을 포위하고 있는 형국이었지만, 보급이 끊긴 소정방은 초초했다. 9월에 함자도(含資道) 총관 유덕민(劉德敏)을 신라에 보내 군량 지원을 요청했는데도 ..

661년 평양성 전투 (2)
01.21 15:21
[고구려사 명장면-115] 661년 8월 대동강 입구에서 고구려군을 격파하고 상륙한 소정방 군은 마읍산(馬邑山)을 빼앗아 진영을 구축하고 마침내 평양성을 포위했다. 소정방과 당군은 기세등등했다. 소정방..

 

661년 평양성 전투 (1)
01.07 15:01
[고구려사 명장면-114] 660년 9월 초에 백제 원정을 마무리한 소정방이 의자왕을 비롯하여 대신 등 1만 수천 명을 포로로 삼아 귀환하였고, 11월 1일에 당 고종은 낙양궁 남문 측천문에서 의자왕을 꾸짖고..

 

2020


백제 멸망에 고구려는 어떻게 대응하였나?
12.24 15:01
[고구려사 명장면-113] 고구려와 느슨한 연합전선을 펼치고 있던 백제의 멸망은 고구려에도 큰 충격이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동안 고구려 남쪽 경계에서 신라의 군사 활동을 백제가 제어하고 있었는데, ..
천남생묘지명 / 사진= 바이두
연개소문은 가문에 국가를 종속시켰다
12.11 15:01
[고구려사 명장면-112] 645년 당 태종의 침공이 시작되어 대외적 위기가 전면에 부각되면서 연개소문의 쿠데타로 인해 일어난 고구려 내부의 권력투쟁은 일단 중단될 수밖에 없었다. 연개소문이 처음에는 ..

안시성주 대 연개소문
11.26 15:01
[고구려사 명장면-111] 645년 당 태종과 당군이 안시성 공격에 실패하고 퇴각한 후 고구려 국내 정세는 어떠하였을까? 무엇보다 안시성주를 비롯하여 건안성, 신성 등 요동 지역 최전선에서 당군의 공세를..

황산벌 전투 뒤집어 보기
11.12 15:01
[고구려사 명장면-110] 지난 회에서 나당연합군에 의한 백제의 멸망을 간략하게 다루었다. 그것도 백제 원정을 통해 당이 장차 고구려 원정을 위해 어떤 경험을 축적하였는지에 초점을 맞추었기 때문에, ..

당은 왜 백제를 공격하였나?
10.29 17:26
[고구려사 명장면-109] 660년 6월 18일 20만이 넘는 대군이 백제의 북쪽 경계 너머 신라 영역에 집결하고 있었다. 덕물도(지금의 덕적도)에는 당의 장수 소정방이 13만 대군을 거느리고 산동반도의 내주(..

고구려와 당, 다시 전쟁을 시작하다.
10.15 15:01
[고구려사 명장면-108] 당 태종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신라도 곤혹스러운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김춘추와 당 태종의 협약은 당 태종의 죽음으로 물 건너 간 듯이 보였다. 당 태종의 유조를 받은 장손무..

고구려, 새로운 전략을 구사하다.
10.09 15:01
[고구려사 명장면-107] 649년 5월 당 태종이 숨을 거두면서 그가 그렇게 열심히 준비했던 고구려 원정 계획도 중단되었다. 게다가 당 태종은 요동 원정을 그만두라는 유언을 남겼다. 뒤를 이어 즉위한 당 ..

당태종과 김춘추의 밀약을 공개하다.
09.17 15:00
[고구려사 명장면-106] 648년 12월에 당태종과 신라 김춘추 사이에 맺은 밀약은 671년에 공식적으로 공개된다. 신라와 당 연합군이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킨 후에 당은 백제 땅에 웅진도독부를 두어 직접..

당 태종과 김춘추, 밀약을 맺다.
09.10 15:03
[고구려사 명장면-104] 648년 12월 겨울, 김춘추는 당나라로 향하는 배를 타고 있었다. 뱃머리에 부딪치는 파도가 차가운 물보라를 일으켰다. 물끄러미 겨울 바다를 지켜보는 김춘추의 마음은 6년 전 평양..

당태종은 설연타 때문에 안시성에서 철군하였나?
08.20 15:01
[고구려사 명장면-103] 당태종이 장안으로 돌아온 때는 646년 3월 7일이었다. 요하를 건넌 645년 10월 1일로부터도 6개월 가까운 시일이 흐른 뒤였다. 그런데 '신당서' 태종본기에는 이를 "고구려로부터 ..

당태종의 승전 조서를 따져보자
08.06 15:01
[고구려사 명장면-102] 645년 9월 18일 안시성에서 철군한 당태종과 당군은 요동성을 거쳐 요하에 도착해 강을 건너기 시작했다. 9월 21일쯤이었다. 요하에는 늪지대인 요택(遼澤)이 200여 리에 펼쳐져 있..


중국인 기억 속의 려당 전쟁
07.23 17:26
[고구려사 명장면-101] 1488년 1월 조선 성종 때 제주에 부임하였다가 부친상으로 고향 나주로 가던 최부(崔溥)는 풍랑으로 표류하다가 명나라 절강성 영파부(浙江省 寧波府) 해안에 표착하여 북경, 요동..

아프라시압 궁전벽화의 고구려인 (3)
07.09 15:01
[고구려사 명장면-100] 아프라시아브 궁전 접견실 벽화의 고구려인은 왜 그곳에 등장했으며, 어떤 역사적 사실을 말하고 있는 것일까? 의당 궁금한 질문이지만, 답은 의외로 간단치 않음을 전회에서 살펴..

아프라시압 궁전벽화의 고구려인 (2)
06.26 15:01
[고구려사 명장면-99] 사마르칸트 아프라시압 궁전 접견실 서벽 벽화에 그려져 있는 두 사람이 고구려인을 그린 것임은 더 이상 재론할 필요가 없다. 그럼 그다음 물음은 당연하다. 왜 고구려인이 그 멀고..

아프라시압 궁전벽화의 고구려인 (1)
06.11 15:01
[고구려사 명장면-98] 2008년 1월 필자는 우즈베키스탄 수도 타슈켄트로 향하는 비행기에 올랐다. 타슈켄트 공항까지 7시간 30분 정도 걸린다고 한다. 비행 시간을 생각하니 내가 지금 매우 먼 곳을 향하..

안시성은 어디에 있나?
05.28 15:01
[고구려사 명장면-97] 안시성은 고구려와 당의 전쟁 역사에서 가장 먼저 기억에 떠올리게 되는 장소이며, 역사 현장이다. 조선 후기 지식인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아니, 오늘 우리보다 더 열정적으로 안..

안시성주 이름은 '양만춘'이 아니다.
05.14 15:01
[고구려사 명장면-96] 645년 9월 18일이었다. 중국 측 기록은 안시성 전투의 마지막 장면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안시성 아래에서 (당군) 병사들이 시위하면서 선회하였다. (안시)성 안에서는 모두가..

려당전쟁 현장중계 6 - 안시성 공방전의 수수께끼
04.30 15:01
[고구려사 명장면-95] 645년 려당전쟁의 최후 승부처가 된 안시성 전투는 워낙 유명해서 따로 부언할 필요가 없을 듯하다. 하지만 그 유명세 만큼 안시성 전투의 전개 상황에 대해서는 그다지 알려져 있지..

려당전쟁 현장중계 5 - 당태종 주인공 만들기
04.16 15:01
[고구려사 명장면-94] 이번 회에서 다루는 전투는 안시성 외곽에서 벌어진 당태종의 군대와 고구려 구원군 간의 전투이다. 중국에서는 이를 '주필산대첩'이라고 부른다. 당태종이 전투를 지휘했던 곳의 본..

려당전쟁 현장중계4 – 당태종은 왜 안시성 공격을 지체하였나?
04.02 15:01
[고구려사 명장면-93] 요동성 함락 이후 당태종과 당군의 행보는 다소 납득하기 어려운 면이 있다. 전회에서 살펴본 바이지만 당군의 행보 일정에만 초점을 맞추어 복기해보자. 당태종과 당의 대군이 요..

려당전쟁 현장중계3 - 백암성주 손대음을 위한 변명
03.19 15:01
[고구려사 명장면-92] 백암성 전투를 다룬 이 글의 부제를 '백암성주 손대음을 위한 변명'으로 붙였다. 645년 당과의 전쟁에서 스스로 항복한 성주는 손대음뿐이었다. 그래서 그는 비겁하고 수치스러운 인..

려당전쟁 현장중계2 ·요동성 전투
03.05 15:01
[고구려사 명장면-91] 5월 2일, 개모성을 함락시킨 이적, 이도종의 군대가 요동성에 도착하였다. 그리고 당태종의 본군이 오기를 기다리면서 요동성을 포위 공격하였다. 5월 5일, 당태종의 본군은 이틀 ..

려당전쟁 현장중계 1 - 첫 전투
02.20 15:01
[고구려사 명장면-90] 고구려 원정에서 당 태종은 수 양제와 달랐다. 중국 통일제국 황제로서의 자만심은 같았지만, 그 자만심을 실현하는 방식이 달랐다. 여기에는 두 인물이 갖는 캐릭터 차이도 있겠지..


당태종 군대의 전력은 어느 정도였나?
02.06 15:20
[고구려사 명장면-89] 645년에 당 태종이 고구려를 원정하기 위해 편성한 군대의 규모나 전력은 어느 정도였을까? 이런 기본적인 질문에 답하기가 그리 쉽지 않다. 중국 역사서 어디에도 당시 당태종이 이..

645년 대전쟁의 전야
01.23 15:01
[고구려사 명장면-88] 당 태종은 고구려 정복의 욕망을 일찍부터 갖고 있었던 듯하다. 다만 대외 형세가 여의치 않았기 때문에 그 뜻을 드러내지 않고 있다가, 640년 5월에 서역의 고창(高昌)국을 정복하..

642년, 대전환의 해
01.09 15:14
[고구려사 명장면-87] 역사를 바꾸는 큰 사건들이 있다. 그런 사건이 한꺼번에 여럿 일어나게 되면, 그런 해는 역사를 바꾸는 해라고 부를 만하다. 예컨대 1894년은 갑오농민운동, 갑오개혁, 청일전쟁이 ..

 

2019


연개소문은 왜 당과 맞서 싸웠는가?
12.28 06:01
[고구려사 명장면-86] 일찍이 단재 신채호는 '조선상고사'에서 연개소문에 대해 "고구려 전통의 호족공화의 구(舊) 제도를 타파해 정권을 통일하고, 서국(西國) 제왕 당 태종을 격파하여 당시 고구려뿐 아..

연개소문은 왜 정변을 일으켰나?
12.12 15:33
[고구려사 명장면-85] 642년 10월, 고구려 장안성 남쪽 벌판. 동부의 막리지 연개소문(淵蓋蘇文)과 그의 병사들이 열병식을 벌이고 있었다. 초대받은 대신들 100여 명이 함께 참석했다. 한창 열병식이 고..

풍운아 연개소문, 알고보니 금수저
11.28 16:30
[고구려사 명장면-84] '풍운아(風雲兒)'라는 말이 있다. 글자 그대로 바람을 일으키고 구름을 휘몰아가는 파란만장한 격동의 행적을 드러내는 인물쯤을 떠올리기 마련이다. 혹시나 해서 국어사전을 찾아 ..

고구려 천리장성은 없다(2)
11.14 15:01
[고구려사 명장면-83] 요동의 고구려 산성을 답사하다 보면 중국의 거대한 통일 제국인 수·당과 생존을 건 치열한 전쟁을 눈앞에 두고 고구려인들이 가졌을 긴장감을 상상해 보게 된다. 아니 단순한 상상..

고구려 천리장성은 없다.
10.31 15:01
[고구려사 명장면-82] "고구려 천리장성은 없다" 다소 도발적인 제목을 보고 독자분들 중에는 잠시 당혹감을 느끼셨을지도 모르겠다. 오해하지 마시라. 고구려 천리장성의 축조 자체가 허구라는 뜻이 아..

고구려 천리장성은 어디에 있었나?
10.17 15:10
[고구려사 명장면-81] 631년(영류왕 재위 14년) 2월에 고구려는 영류왕은 천리장성을 쌓기 시작하였다. 이 사실을 '삼국사기' 고구려본기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당나라가 광주사마(廣州司馬) 장..

'황제천칸'이 된 당 태종, 고구려를 넘보다.
10.03 15:01
[고구려사 명장면-80] 626년 7월 2일 아침, 이세민은 황궁의 북문인 현무문에서 일대 거사를 일으켰다. 황제의 부름으로 입궐하는 형 태자와 동생을 처단한 것이다. 태자의 입궐 자체가 이세민의 책략에 ..

영류왕은 사대주의자인가?
09.19 15:01
[고구려사 명장면-79] 642년 연개소문은 정변을 일으켜 영류왕을 살해하고 집권하였다. 이 사건은 후세에 영류왕과 연개소문을 서로 대척적인 인물로 평가하는 계기가 되었다. 특히 연개소문을 고구려의 ..

강서대묘 깊이보기 7 - 주작과 현무
09.05 15:01
[고구려사 명장면-78] 지난 회 청룡과 백호에 이어 이번 회에서는 나머지 주작과 현무를 그린 벽화를 살펴보도록 하겠다. 주요 대상 역시 지난 회와 짝을 이루기 위해 호남리사신총, 진파리1호분, 오회분 ..


강서대묘 깊이보기 6 -청룡, 백호
08.22 15:01
[고구려사 명장면-77] 사신도가 널방의 사방 벽면에서 주인공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벽화고분은 6세기 들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무덤 구조도 무덤길과 하나의 널방으로 구성되어 있는 외방무덤이란 특징..

강서대묘 깊이보기 5 - 사신도는 언제부터 그려졌나?
08.08 15:01
[고구려사 명장면-76] 강서대묘 사신도가 워낙 뛰어난 품격을 자랑하다 보니 고구려 사신도를 강서대묘의 그것을 기준으로 생각하는 듯하다. 하지만 강서대묘 사신도처럼 뛰어난 걸작이 그냥 절로 나타나..

강서대묘 깊이보기 4 - 황룡과 신수(神獸)
07.25 15:01
[고구려사 명장면-75] 강서대묘 하면 의당 사신도부터 떠올리기 때문에, 오히려 필자는 무덤 공간의 균형과 조화로움으로부터 시작해서 천장의 여러 그림들부터 살펴보고 있다. 이번 회가 천장 그림으로는..

강서대묘 깊이보기 3 - 비천과 선인
06.27 15:08
[고구려사 명장면-74] 강서대묘의 천장 고임에는 하늘 세계를 구성하는 다양한 존재들이 등장하고 있다. 그중에 이번 회에서는 불교신앙에서 비롯하는 천인(天人)과 신선신앙이나 도교신앙의 선인(仙人)들..

강서대묘 깊이보기 2 - 수목도
06.13 15:01
[고구려사 명장면-73] 산악은 산악으로만 존재하지 않는다, 산악에는 나무가 숲을 이루기 마련이다. 거대한 암반이나 기괴암석으로 이루어진 봉우리일지라도 나무가 드문드문 곁들여지지 않으면 멋진 풍광..

강서대묘 깊이 보기 1 - 산악도
05.30 15:01
[고구려사 명장면-72] 전회에서 밝힌 바와 같이 필자는 2005년 평양을 방문하여 고구려 벽화고분 다수를 조사하였다. 평양 체류 기간 일주일 내내 쉼 없이 고구려 유적을 조사하였기에 어느 하루도 흥분과..

고구려 벽화고분의 최고봉, 강서대묘를 찾아서
05.16 15:01
[고구려사 명장면-71] 2005년 7월 베이징에서 평양으로 향하는 조선항공에 몸을 실었다. 평양 일대의 고구려 유적을 조사하러 가는 길이었다. 꿈에도 그리던 고구려 유적을 직접 내 눈으로 볼 수 있다는 ..

'한왕묘'와 강서3묘의 주인공은 누구인가.
05.02 15:37
[고구려사 명장면-70] 평양 일대 고구려시대 고분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큰 고분은 평양시 중심부에서 동북쪽으로 약 30㎞ 떨어진 평안남도 평성시에 위치한 경신리1호분이다. 기단부 한 변 길이가 약 54m이..

동명왕릉인가, 장수왕릉인가?
04.18 15:01
[고구려사 명장면-69] 평양 동남쪽 제령산 서쪽 기슭에는 고구려의 시조 동명왕의 능으로 전해지는 무덤이 있다. 이른바 전(傳)동명왕릉이다. 무덤의 외형을 보면 2단의 돌기단 위에 사각추형으로 흙을 ..

평양에 남아 있는 고구려 왕릉은 어느 왕의 무덤일까?
04.04 15:30
[고구려사 명장면-68] 지난 10여 회에 걸쳐 고구려와 수의 전쟁, 그리고 이 전쟁의 요인 중 하나인 고구려 요서 진출을 포함하여 고구려 사방 영역에 대해 살펴보았다. 이제 고구려 말기로 넘어가기 전에 ..

고구려의 동계와 책성
03.21 15:01
[고구려사 명장면-67] 고구려의 동쪽 경계에 대해서는 '위서(魏書)'에 고구려의 영역이 동쪽으로 책성(柵城)에 이른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는 435년 장수왕대에 고구려를 방문했던 북위(北魏) 사신 이오(..

고구려의 북쪽 경계는 어디까지?
03.07 15:01
[고구려사 명장면-66] 고구려가 6세기 중반 이후 요하를 너머 요서로 진출하여 대릉하 하류와 의무려산을 잇는 선까지 영역의 경계를 확장했음에 대해서는 전 회에서 언급했다. 다만 고대에 영역 경계는 ..


고구려의 요서 진출은 언제, 왜 이루어졌나?
02.21 15:01
[고구려사 명장면-65] 고구려의 서쪽 영역 경계가 내내 요하 일대에 머물지 않았을 가능성은 이미 전회에서 언급한 바 있다. 하지만 관련 자료가 의외로 드물고, 그마저도 매우 단편적이어서 고구려가 요..

고구려의 영역은 어디까지일까?
02.07 15:01
[고구려사 명장면-64] 당나라 때 편찬된 역사책 '수서(隋書)'에서는 백만 대군을 동원한 612년 수양제의 고구려 원정의 실패를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이번 전쟁에서 겨우 요수 서쪽 적(고구려)의 무려..

려수전쟁 총결산
01.24 15:01
[고구려사 명장면-63] 요동성에 대한 총공세를 눈앞에 두고, 양현감의 반란으로 부득이 군사를 돌릴 수밖에 없었던 수양제는 반란을 진압한 뒤 이듬해 614년 2월에 다시 조서를 내려 고구려 정벌을 의논케..

려수전쟁 현장 중계 5 - 2차 요동성 전투
01.10 15:01
[고구려사 명장면-62] 612년 첫 원정에서 요동성 앞에서 군사를 돌이킬 수밖에 없었던 수양제는 패전의 책임을 온통 우문술에게 뒤집어씌워 쇠사슬로 묶어 낙양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양제는 첫 원정의 패..

2018

 

을지문덕은 누구인가?
12.27 15:01
[고구려사 명장면-61] 지난 회에 려수전쟁 현장 중계 네 번째 전투로 살수대첩을 다뤘는데, 주로 수나라 별동대의 구성과 살수전투까지의 경과에 초점을 맞춰 그동안 별로 주목하지 않은 내용을 언급했다...

려수전쟁 현장중계 4 - 살수대첩
12.13 15:01
[고구려사 명장면-60] 살수의 푸른 물결 굽이쳐 흐르는데 수나라 백만대군이 이곳에서 고기밥이 되었구나 촌부들은 지금도 웃으며 이야기한다 수양제의 헛된 정복의 꿈을 조선 왕조 개국공신인 조준(..

려수전쟁 현장중계 3 - 평양성 전투
11.29 15:01
[고구려사 명장면-59] 수양제가 이끄는 백만대군과 전면전을 펼친 612년 전쟁에서 고구려군은 곳곳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놀랄 만한 승리를 거두었는데, 전회에서 살펴본 요하 전투와 요동성 전투가 대표적..

려수전쟁 현장중계 2 - 요동성 전투
11.15 15:01
[고구려사 명장면-58] 수양제는 요하를 건너자 다시 조서를 내렸다. 천하에 사면(赦免)을 베풀고, 형부상서(刑部尙書) 위문승(衛文昇) 등에게 명하여 요하 동쪽의 백성들을 위무하게 하고, 10년 동안 ..

려수전쟁 현장중계 1 - 요하 전투
11.01 15:30
[고구려사 명장면-57] 수양제는 612년 정월에 탁군을 출발했다. 598년 1차 원정 시 6월에 임유관을 출발했던 것과 비교하면 출정 시기를 거의 5개월이나 앞당긴 것이다. 1차 원정이 실패했던 요인 가운데 ..

수양제는 왜 직접 고구려 원정에 나섰나?
10.18 15:05
[고구려사 명장면-56] 604년 수양제는 아버지 문제(文帝)가 사망하자 황태자로서 황제위에 올랐다. 그런데 양제의 즉위에 불만을 품은 막내 동생 한왕 양량(楊諒)이 반란을 일으켰다. 이를 무사히 진압했..

고구려 원정에 나선 수 양제의 군대, 과연 113만명이 넘었을까
10.04 15:01
[고구려사 명장면-55] 612년 봄 정월, 수양제는 고구려 원정군의 출진을 명령하는 조서를 내렸다. '수서'에 따르면 당시 동원된 수나라 육군은 좌익 12군, 우익 12군 총 24군이었다. 그런데 군사 수가 너..

수양제의 고구려 침공은 왜왕 국서 때문?
09.20 15:01
[고구려사 명장면-54] 수양제가 고구려 침공에 집착한 이유나 배경은 복합적이다. 그 거대한 규모의 군사 동원이나 왕조가 멸망할 정도로 국운을 걸고 벌이는 전쟁이 일어난 배경에는 의당 다양한 요소들..


수양제는 왜 고구려를 침공했나?(1)
09.06 15:01
[고구려사 명장면-53] 수양제는 왜 고구려를 침공했을까? 598년 아버지 문제 때 동생 양량(楊諒) 등이 30만군을 동원했지만 요하를 건너지도 못하고 수많은 군사만 잃고 빈손으로 돌아온 상황을 수양제..

수문제의 고구려 침공은 왜 실패했는가?
08.23 15:01
[고구려사 명장면-52] 598년 영양왕의 요서 출격에 대한 수나라 조정의 반응은 고구려의 예상을 크게 벗어났다. 사실 동북 변경에서 일어난 작은 충돌로 가볍게 넘어갈 수도 있을 만큼 전투 규모는 그리 ..

고구려 영양왕 '요서 출병'을 둘러싼 미스테리
08.09 15:01
[고구려사 명장면-51] 598년 2월, 영양왕은 1만 말갈 기병대를 거느리고 요하를 건넜다. 당시 요서 지역에는 고구려의 군사초소인 무려라가 있었다. 문헌기록으로 확인되지 않지만, 아마도 영양왕은 이곳 ..

7세기 동아시아 대전쟁을 주목하는 이유
07.26 15:01
[고구려사 명장면-50] 역사를 왜 공부하는가? 역사란 이미 지나간 과거인데, 그 과거를 아는 게 오늘 우리에게 무슨 도움이 되는가? 수업시간에 학생들뿐만 아니라 주위 지인이나 일반 시민들로부터도 ..

고구려의 수도 평양 옆 신도시 '장안성', 이곳으로 천도한 이유는?
07.12 15:01
[고구려사 명장면-49] 586년, 고구려 평원왕이 즉위한 지 28년째이다. 고구려 수도 평양성에 큰 소란이 일었다. 새로 거대한 성곽을 쌓고 시가지를 조성한 신도시로 왕실 사람과 귀족들부터 대규모 이주를..

온달 이야기가 보여주는 삼국시대 다양한 인간상
06.28 15:20
[고구려사 명장면-48] 지난 2회에 걸쳐 우리는 온달 설화에서 역사적 사실을 최대한 찾아보았다. 그 결과 온달은 실존 인물이며 그가 평원왕의 공주와 결혼한 것도 사실일 가능성을 확인하였다. 하지만 뭐..

온달의 회한 서린 아단성, 서울 아차산성일까 단양군 온달산성일까?
06.14 15:01
[고구려사 명장면-47] 단양군 영춘면에는 세칭 온달산성이라 불리는 산성이 있다. 고구려 장군 온달의 비극적 최후를 담은 전설이 전해지는 곳이다. 요즘에는 산성 아래에 영화촬영 세트장 등 관광지로 개..

고구려의 한강 땅에 대한 집념의 상징, 온달은 실존 인물인가?
06.07 15:01
[고구려사 명장면-46] '삼국사기'에 전하는 고구려인들의 이야기 중에서 뭐니 뭐니 해도 가장 흥미로운 이야기는 온달전이다. 주인공들의 캐릭터도 개성이 넘칠 뿐만 아니라 풍부한 내용과 극적인 반전 등..

신라 진흥황 순수비를 통해 분석해본 고구려의 대외전략
05.17 15:30
[고구려사 명장면-45] 6세기 고구려 역사에서 기억할 만한 장면들 중에는 한순간에 한강 유역을 잃게 되는 다소 당혹스러운 역사도 있지만, 그 이면에는 위기를 기회로 만드는 고구려의 또 다른 저력도 찾..

고구려는 왜 100여년 지배하던 한강유역을 빼앗겼을까?
05.03 15:01
[고구려사 명장면-44] 551년, 백제 성왕과 신라 진흥왕은 군사동맹을 맺었다. 동맹의 목표는 고구려 공격이었다. 동맹의 두 주역인 성왕과 진흥왕, 비록 나이는 큰 차이가 있지만, 두 사람 모두 영웅적 풍..

서울 구의동 '고구려 보루 유적'에 담긴 비밀
04.19 18:10
[고구려사 명장면-43] 서울시 광진구 잠실대교 북단 한양아파트가 있는 곳은 해발 53m의 태봉이라 불리는 구릉이었다. 이 구릉 정상부에 무너져 내린 둥근 형태의 석축 시설물이 있었다. 1977년 이 일대에..

안장왕의 죽음으로 끝난 한씨(漢氏) 미녀와의 사랑
04.05 15:01
[고구려사 명장면-42] 한강변 행주 일대, 즉 과거 고구려 왕봉현이란 이름에 얽혀 있는 한씨(漢氏) 미녀와 안장왕의 로맨스는 그냥 가공의 설화는 아닐 것이다. 역사상 그리 이름나지 않은 인물인 안장왕..


고구려 안장왕과 한씨 미녀의 로맨스 이야기
03.22 15:01
[고구려사 명장면-41] 경기도 고양시에 있는 행주산성과 그 주변 일대는 고구려시대 왕봉현(王逢縣)이란 행정구역이었다. 우왕현(遇王縣) 또는 왕영(王迎)이라고도 부르는데 모두 같은 의미다. 즉 왕을 만..

고구려 장수왕, 신라 눌지마립간 만나러 왜 충주에 왔을까
03.08 17:13
[고구려사 명장면-40] 엊그제 남북 정상회담이 곧 열리게 된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아직은 바람에 찬 기운이 남아 있는데, 한반도 평화를 바라는 모든 이의 염원을 담은 훈풍이 봄바람보다 먼저 불어온 것..

한반도 유일의 고구려비 발견, 그 숨막히던 순간
02.22 15:01
1979년 충북 중원서 모습 드러낸 중원고구려비한반도 유일의 고구려비, 중원고구려비의 발견 [고구려사 명장면-39] 1979년 4월 8일, 충북 중원. 입석(立石)마을 입구 선돌에서 글씨가 발견되었다는 소식..

국방과 외교의 천재 장수왕이 한국에 주는 교훈
02.08 15:01
[고구려사 명장면-38] 장수왕이 북연 문제를 둘러싸고 북위와 송에 대해 강경과 온건, 또는 양면책을 적절하게 구사하였음을 전회에서 살펴보았다. 재위 초기에 얻었던 이런 외교 경험을 바탕으로 장수왕..

81세에 백제 한성 함락한 치밀한 장수왕의 노익장
01.25 15:01
[고구려사 명장면-37] 장수왕대의 역사에서 명장면 하나를 고르라면 아무래도 백제 한성(漢城) 함락을 꼽지 않을 수 없다. 475년 9월, 장수왕은 직접 3만 군사를 거느리고 한강을 건너 백제의 수도 한성을..

무섭게도 현실적인 장수왕 두번째 외교안보 위기 넘다
01.11 15:01
[고구려사 명장면-36] 전 회에서 장수왕의 탁월한 외교 능력을 보여주는 첫 사례로서 436년 화룡성 출병을 살펴보았다. 그런데 화룡성 출병 사건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이번회에서는 그 뒷이야기로서..

 

2017


436년 일촉즉발 화룡성 대치…고구려사 극적 명장면
12.28 15:01
[고구려사 명장면-35] 436년 5월, 북연(北燕)의 수도 화룡성(和龍城) 일대는 일촉즉발의 긴장감이 감돌았다. 화룡성을 둘러싸고 동쪽에서 진군한 고구려군, 서쪽에서 다가온 북위군이 서로 군세를 자랑하..

고구려는 왜 평양으로 천도했을까
12.14 15:01
[고구려사 명장면-34] 장수왕은 아버지 광개토왕의 뒤를 이어 고구려의 전성기를 연 인물이다. 아버지의 유지를 충실히 계승했음에도 그는 여러 모로 아버지 광개토왕과 대비되는 군주였다. 장수왕(長壽王..

각저총 씨름도가 말하는 고구려의 전통과 개방성
11.30 15:01
[고구려사 명장면-33] 무용총과 마치 쌍둥이 무덤처럼 나란히 자리하고 있는 벽화고분이 각저총(씨름무덤)이다. 각저총의 축조시기는 5세기 초반 혹은 중반으로 추정되는데, 무용총보다는 다소 앞설 가능..

무용총 벽화의 명장면(2) - 수렵도
11.02 15:01
[고구려사 명장면-32] 수렵도는 고구려 고분벽화에 많이 등장하는 제재 중의 하나이다. 그중에서도 수렵도하면 누구나 얼른 떠올리는 그림이 무용총의 수렵도일 만큼 워낙 널리 알려져 있다. 이 수렵도는 ..

무용총 벽화의 명장면(1) - 가무배송도
10.19 15:16
[고구려사 명장면-31] 평양 일대에 위치한 덕흥리 벽화고분을 5회에 걸쳐 살펴보았는데, 벽화 이야기가 나온 김에 평양지역이 아닌 고구려의 오랜 수도였던 국내성에 위치한 벽화고분도 살펴보는 게 균형..

고구려인이 꿈꾼 내세 '덕흥리고분 무덤방'
10.13 06:01
[고구려사 명장면-30] 덕흥리고분의 무덤방은 글자 그대로 고구려인들이 죽어서 가고 싶은 내세를 구현한 곳이다. 천장 그림들은 고구려인들의 꿈과 상상이 가득한 하늘세계의 표현이다. 하지만 이런 도상..


고구려인의 사랑 담긴 덕흥리고분 견우직녀도
09.28 20:01
[고구려사 명장면-29] 필자가 덕흥리고분을 만난 개인적인 기억을 잠시 돌이키고자 한다. 덕흥리 벽화고분이 발굴되고 1981년에 보고서가 출간되었다는 소식을 뒤늦게 들었지만, 국내에서는 이를 구할 수 ..

고구려, 정말 북경 진출했나 덕흥리 고분은 말하고 있다
09.14 15:30
고구려는 북경까지 진출했는가? [고구려사 명장면-28] "고구려, 북경까지 진출했다." "베이징은 고구려 땅이었다." 덕흥리고분을 소개하는 언론들이 단 기사 제목은 대개 이런 식이었다. 이러한 내용..

유주자사 진의 출신지는?
08.31 15:45
[고구려사 명장면-27] 덕흥리 고분이 던진 파문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 핵심은 무덤 주인공의 출신 국적이 어디냐, 그리고 그가 지낸 유주자사라는 관직의 수여 주체가 누구이냐, 혹은 유주자사가 실직..

고구려 역사의 노다지, 덕흥리고분
08.17 15:02
[고구려사 명장면-26] 1976년 12월 8일, 북한 남포시 강서구역 덕흥동(옛 지명: 평안남도 대안시 덕흥리) 무학산 서편 옥녀봉의 남쪽 자락. 향금산이라고 불리는 구릉에서 관개수로 공사 중 고구려 시대 ..

고구려는 천하(天下)의 중심이다.
08.03 15:01
[고구려사 명장면-25] 고구려 수도 국내성에 있는 모두루 무덤에 쓰여 있는 묘지(墓誌)에는 이런 표현이 담겨 있다. "하백(河泊)의 손자이며 일월(日月)의 아들인 추모성왕(鄒牟聖王)이 북부여(北夫餘)..

광개토왕이 정복한 영토 중 가장 중요한 땅은 어디일까
07.21 06:01
[고구려사 명장면-24] 광개토왕 정복활동의 성과, 즉 그 왕호의 '광개토경'이라고 하면 흔히 만주대륙의 드넓은 평원을 떠올리게 마련이다. 그런데 그 이름을 붙인 고구려인들도 과연 그렇게 생각하였을..

황제 칭제 안한 고구려, 자주의식 반영 '태왕' 때문
07.06 15:02
[고구려사 명장면-23] 왕조시대에는 왕(王)의 권력이 매우 크기 때문에, 왕이 어떤 사람인가에 따라 나라의 운명에 미치는 영향도 결코 작지 않다. 따라서 어느 왕조든 그 사회에서 모범적이고 이상적으..

광개토왕비문에 보이는 고구려의 가야 정벌 전쟁
06.22 15:01
[고구려사 명장면-22] 얼마 전 문재인 대통령이 가야사 복원과 관련된 언급을 해서 역사학계에서 이런저런 논란이 이어지고 있다. 그동안 가야사 연구나 교육이 삼국에 비해 상대적으로 소홀하게 다루어졌..

3부작 구성 광개토왕비문 그 연결과 독립성의 비밀
06.08 15:01
[고구려사 명장면-21] 이번 회에서는 광개토왕비에 대해 상상력이 다소 발휘된 주제를 이야기하고자 한다. 혹 독자분 중에는 상상력이 지나치다고 할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사료와 논거가 부족하더라도,..

광개토왕비문 분석해보니 정교한 건물 설계도 수준
05.25 15:01
[고구려사 명장면-20] 보통 광개토왕비문에서 정복기사, 전쟁기사에 많이들 주목하지만 꼼꼼히 읽어보면 당대 고구려인의 의식 세계를 들여다볼 수 있는 소중한 기사도 적지 않다. 이 글에서 살펴보려는 ..

엄청난 크기와 독특한 모양 광개토태왕비에 얽힌 비밀
05.11 15:01
[고구려사 명장면-19] 414년 아들 장수왕은 아버지 광개토왕을 산릉에 모시고, 그 훈적을 기리기 위해 거대한 비를 세웠다. 그 비는 내내 그 자리에 서서 장수왕의 뜻대로 광개토왕의 훈적을 오늘 우리에..

광개토태왕비 내용 해석 다양할 수밖에 없는 이유
04.27 15:01
[고구려사 명장면-18] 1972년 10월 재일 사학자 이진희 씨는 "일본 육군 참모본부가 광개토왕비를 변조했다"고 충격적인 주장을 했다. 그가 '광개토왕릉비의 연구'란 책에서 밝힌 변조의 전말은 이렇다. 1..


광개토대왕의 아버지 고국양왕을 재평가한다
04.13 15:10
[고구려사 명장면-17] 고구려 중흥의 기틀을 만든 소수림왕, 고구려를 동북아시아의 패자로 자리 잡게 한 광개토왕. 이 두 왕 사이에 고국양왕이 있다. 소수림왕의 아우이며, 광개토왕의 아버지이다. 형과..

국가 대개조작업 성공한 소수림왕 리더십의 실체
03.30 15:01
[고구려사 명장면-16] 가정을 하나 해보자. 만약 오늘날 우리가 주변 국가와 전쟁을 여러 차례 치르고 두 번이나 큰 패배를 당하였다고 해보자. 그것도 보통 패배가 아니라 한 번은 서울이 적에게 함락돼 ..

안악3호분을 해부한다(4) - 공무 생활과 행렬도
03.16 15:01
[고구려사 명장면-15] 안악3호분은 지난 회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고구려 귀족의 저택을 재현하는 공간과 벽화로 구성되어 있는데, 살림집의 구체적인 모습은 앞방의 동, 서 곁방에 그려져 있다. 그리고 ..

안악3호분이 알려주는 고구려 귀족저택의 모습
03.02 15:13
[고구려사 명장면-14] 안악3호분은 무덤방 크기에 있어서도 고구려 벽화고분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크며, 또한 널길과 앞방, 좌우 곁방, 널방, 그리고 널방을 'ㄱ'자 모양으로 돌아가는 회랑 등으로 가장 ..

안악3호분을 해부한다(2) - 동수의 관직에 숨은 비밀
02.16 16:03
[고구려사 명장면-13] 지난 회에 잠시 인용했던 동수 묘지 묵서명 중, 이번 회에 필요한 동수의 관직 부분만 다시 환기해보자. "사지절(使持節) 도독제군사(都督諸軍事) 평동장군(平東將軍) 호무이교위(..

안악3호분을 해부한다(1) - 황해도 안악3호분의 주인은?
02.02 15:01
[고구려사 명장면-12] 1949년 황해도 안악군에서 3기의 고구려 벽화고분이 발견되었다. 그 가운데 특히 3호분이 눈길을 끌었다. 무덤의 규모가 크고 벽화의 보존 상태도 좋았을 뿐 아니라 무덤 안에는 250..

시련을 겪은 비운의 군주, 고국원왕은 누구일까
01.19 15:01
[고구려사 명장면-11] 고구려사를 읽다 보면 좀 비장하게 느껴지는 왕이 있다. 고국원왕(故國原王)이다. 흔히 고구려 하면 활발한 정복 활동이나 치열한 전쟁의 장엄한 승리라는 이미지를 떠올리게 마련인..

왕, 백성을 위해 정치하라 고구려가 전한 바른 정치
01.05 15:02
[고구려사 명장면-10] 293년 9월, 봉상왕의 아우 돌고는 자결하고, 그의 아들 을불(乙弗)은 도망하여 민간에 몸을 숨겼다. 아우가 자신의 왕위를 넘볼까 두려워한 봉상왕이 돌고를 위협했기 때문이었다. ..

 

2016


관구검에 당했던 동천왕은 재평가가 필요한 전략가
12.22 15:12
[고구려사 명장면-9] 독자들께서는 어린 시절 위인전 등에서 읽은 '밀우와 유유' 이야기를 기억하실 것이다. 그 내용을 환기하면 이렇다. 위나라 장군 관구검이 침공하자 맞서 싸우던 동천왕이 패배하여..

3대에 걸쳐 왕후와 태후 고구려의 여걸 우씨 왕후
12.08 08:59
[고구려사 명장면-8] 우리 역사에서 55년 동안 왕후와 태후로 권력의 핵심에 있었던 여인이라면 누가 떠오르는가?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역대 어떤 여걸 못지않은 고구려 우씨 왕후 이야기를 해볼까한다..

대제국 고구려의 기틀은 공공성 갖춘 인재들 덕분
11.25 06:01
[고구려사 명장면-7] 고구려 8대왕의 왕호는 신대왕(新大王)이다. 즉 '새 대왕'이다. 새로 왕위에 오르면 누구나 '새 왕'이 될 터인데, 왜 이 왕에게만 이런 왕호가 붙었는지 음미해 볼만하다. 당시 고구..

고구려 국내성 천도 언제? 삼국사기도 믿기 어렵네
11.10 15:01
[고구려사 명장면-6] 고구려 건국 시조 주몽왕이 처음 도읍한 곳은 졸본(卒本)이다. 졸본의 위치는 오늘날 중국 요령성 환인시(桓仁市) 일대로 보는데 거의 이견이 없다. 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전한다..


낙랑공주가 살았던 그곳, 요동·요서·한반도 중 어디?
10.27 15:01
[고구려사 명장면-5] 때는 32년 4월, 낙랑국의 도성. 군사들이 다급한 목소리로 낙랑왕 최리(崔理)에게 고구려군이 바로 성문 앞까지 쳐들어왔다고 보고하였다. "아니 자명고각(自鳴鼓角)이 어찌 울리지..

또 다른 시조, 태조대왕
10.14 15:01
[고구려사 명장면-4] 시조 주몽왕(동명성왕) 말고도 시조처럼 불린 왕이 있다. 바로 태조대왕이다. 태조(太祖)라는 시호는 보통 왕조를 개창한 왕에게 붙여지는 칭호다. 고구려에는 엄연히 주몽이라는 시..

고구려 건국 시조는 누구? 주몽인가? 동명인가?
09.29 15:06
[고구려사 명장면-3] 고구려의 건국 시조는 주몽왕(朱蒙王), 또는 동명왕(東明王)으로 알고 있다. 건국신화의 주인공인 주몽의 아버지는 천제(天帝) 혹은 해모수이며, 어머니는 강의 신 하백(河伯)의 딸 ..

'고구려' 국호 유래를 보면, 통일 한국 국호 보인다
09.16 06:01
[고구려사 명장면-2] 고구려의 성립에 대하여 '삼국사기'에는 기원전 37년 주몽에 의해 건국되었다고 기록돼 있다. 그렇다고 '고구려'란 국명이 이때 처음 등장하는 것은 아니다. 중국 한나라가 고조선을..

고구려사는 오늘 우리에게 어떤 역사인가
09.02 06:01
[고구려사 명장면-1] '고구려'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미지 혹은 단어가 무엇인가? 아마도 만주대륙, 광개토왕, 철갑 기마무사, 광대한 영토 등을 첫손에 꼽을 것이다. 또는 중국의 통일제국인 수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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