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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노에 후미마로 (近衛文麿, 일본인, 1891~1945) 에 관한 논문 하나 (링크) 본문
웹서핑하다 본 것을 정리. 이 사람에 대한 학계의 중론은 저는 모릅니다. 인터넷 위키같이 아무나 적는 야사같은 글말고는 아래 글이 사실상 처음 본 것입니다. 저자도 아는 사람이 아니고.. 전체적으로 다른 저자들의 기록을 정리한 느낌이지만, 이야기를 제대로 알고 싶으면 다른 문서도 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끄적거리고나서 다시 보니 제가 봐도 이건 아닌데싶은 대목이 있네요. 더 찾아보기가 귀찮아 일단 이대로 방치합니다. 전공도 아니고 저도 잘 모르고 적은 내용이니, 이건 아닌데싶은 부분이 있으면 직접 찾아보세요.)
고노에 후미마로에 대해서는 일단 3가지를 알고 읽으면 편합니다.
1. 중일전쟁시기에 일본 총리를 지낸 사람으로, 중일전쟁을 확전시켰습니다.
2. 1891년생입니다. 즉, 고노에가 성년이 됐을 때쯤 일본은 청일전쟁, 러일전쟁에 승리하고 조선을 식민지로 만들어 자칭 '탈아입구한 열강' 이라고 자부할 때입니다. 근대 일본에서 혈통으로는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 일본의 최고지배계급이며, 당대 일본의 교육 문화 혜택을 다 받은 사람입니다.
3. 전대의 권신 사이온지 긴모치에게 후대를 맡길 만한 인재로 꼽혔습니다(그랬지만, 말년의 사이온지에게 절망을 안겨준 사람이었다고도 합니다)
아래 논문에서는 고노에가 마치 빌헬름2세 황제와 비슷한 성향을 가졌던 것처럼 말합니다. 청년기 사진만 보면 헤어스타일은 자유분방할 것 같은 느낌이지만 1, 남부럽지 않게 외국유학물을 충분히 먹은 그는 '청과 러시아를 이긴 아시아 신흥국'(일본)의 최고귀족 혈통 직계'인 자존심 강한 청년으로서, 서구의 상류층과 교류하며 마음속에 쌓인 감정이 많았던 모양입니다. 2
고노에는 일본에 돌아와 세상에 입을 연 초기부터 세계를 '가진 나라'와 '못 가진 나라'(그 미만은 먹잇감으로 간주)로 나누고, 일본은 못 가진 나라라고 보고는 기득권인 열강에게 도전해 일본이 동등한 대우를 획득해야 한다고 주장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당시의 일본사회를 앞서간 그의 남눈치안보고 자유분방한 언행과 어울리는 그런 대담한 논지는, 사이온지와 같은 원로들이 그것을 '유망한 젊은 세대의 패기'라고 받아들이게 했던 모양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큰 착각이었고, '열강으로 올라서던 일본에서 자란 신세대'인 고노에가 총리가 된 다음에 벌어진 확장정책은, 일본을 선진국 말석에 앉힌 메이지시대 구세대를 경악시켰습니다.
고노에 후미마로(近衛文麿)의 국제질서관과 제국 일본의 전쟁원인
일본연구논총 약어 : KJJS
2018, vol., no.48, pp. 43-64 (22 pages)
DOI : 10.35368/kjjs.2018..48.002
발행기관 : 현대일본학회
박영준(국방대 안보대학원)
Ⅰ. 서론
Ⅱ. 고노에 후미마로의 국제질서관
Ⅲ. 중일전쟁과 고노에 후미마로
Ⅳ. 아시아·태평양전쟁과 고노에 후미마로
Ⅴ. 맺는 말
근대 일본에 관한 대부분의 연구들은 고노에의 외교인식과 실제 정책 수행이 중일전쟁 및 아시아·태평양전쟁의 발발, 그리고 일본군국주의의 전개에 지대한 역할을 했다고 평가한다.
예컨대 비즐리(Beasley)나 허버트 빅스(Herbert Bix)와 같은 영미권 학자들은 1920년대 말 세계적인 대공황 이후 일본 내에서는 서구와의 협력노선을 대체하여, 국수적인 일본 민족주의가 대두하기 시작했다고 지적한다. 특히 영국 및 러시아를 국제질서의 악한으로 묘사하며 일본이 아시아 리더십을 대표해야 한다고 주장한 기타 잇키(北一輝) 및 육군내의 강경소장파 세력과 더불어 고노에 후미마로도 이러한 경향을 대표한다고 설명하였다.
일본 연구자들도 대체로 같은 인식을 보인다. 이리에 아키라(入江昭)도 1937년 수상 취임 이후 고노에가 미국이나 영국 등과 대립하며, 만주 및 중국에 서 일본의 이익을 확보하기 위한 군사행동을 추진했다고 평가한다. 우스이 가츠키(臼井勝美)는 1937년부터 1941년간 고노에가 35개월간 총리로서 재직했 다고 밝히면서, 중일전쟁 발발, 일본-독일-이탈리아 3국 동맹 체결 과정에서 고노에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지적한다. 기타오카 신이치(北岡伸一)도 고 노에가 중일전쟁의 확대과정에 중대한 책임이 있고, 미일개전의 사상적 기원도 그에게서 찾아볼 수 있다고 평가한다.
(......) 고노에 후미마로의 대외인식과 실제 외 교정책은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승전국인 영국 및 미국에 대해 국제협조주의 경향을 취하던 일본이 이를 이탈하여 군국주의로 치닫던 일본의 행보를 이해하 는데 중요한 단서가 되고 있다.
그가 처음으로 대외정책에 관한 의견을 공식적인 형태로 피력한 것은 1918년 12월, 제1차 세계대전의 종전 직후 발표된 「영미 본위의 평화주의를 배격한다 (英美本位の平和主義を非す)」는 글을 통해서였다 (......)
대학을 갓 졸업한 청년 고노에 후미마로는 1918년 발표한 글에서 (1차대전 승전국으로서 일본은 영국과 미국 등 국제사회 주도국가들과의 협력을 공고히 하면서 해군 군축에 임하고, 국내적으로는 민주주의체제 정립 등을 추진해야 한다는) 일본 국내의 주류 의견을 반박하였다. 그는 “우리 나라 최근 논단은 영미정치가들의 화려한 선언에 매료되어, 그들이 말하는 민주주의와 인도주의의 배후에 숨어있는 많은 자각되지 않은, 또는 자각된 이기주의를 통찰하지 않고, 일본인으로서의 입장도 잊고, 무조건적 무비판적으로 영미 본위의 국제연맹을 구가하고, 그것으로 정의 인도에 부합하는 것처럼 보는 것이 매우 현격하다”고 지적하였다.
그는 일본 주류 정치가들이 협력하려고 하는 영국과 프랑스 등이 실은 “그 식민의 역사가 보여주는 바와 같이 이미 세계의 열등 문명 지방을 점령하여 이를 식민지로 하고 그 이익을 독점”해온 국가들에 다름아니라고 비판하였다. 그러한 입장에서 그는 유럽 전쟁이 “(영국, 프랑스와 같은) 기성의 강국들과 (독일과 같은) 미성(未成)의 강국 간의 전쟁”, 혹은 “현상유지를 편리하다고 하는 국가들과 현상타파를 편리하다고 하는 국가 간의 전쟁”이었다고 평가한다. 영국과 미국같은 기성의 강국들이 토지와 식민지를 다 차지한 상태에서 “독일이 이 상태를 타파하려고 했던 것은 실로 정당한 요구”였다고까지 평가했다. 전쟁 종료 이후 영국과 미국이 평화주의를 표방하고, 국제연맹을 만들고, 군비제한을 하려는 정책들도 실은 “현상유지를 편의로 하는 것이고, 하등 정의 및 인도와 관계없는 것”이라고 평가절하하였다. 오히려 국제연맹과 같은 기구들은 “대국들이 경제적으로 소국을 병탄하고, 후진국으로 영원히 선진국을 숭배하게 하는 사태를 노정할 위험이 있는 것”이라고 경계하였다.
그는 일본으로서는 자신을 본위로 생각하면서, 기성의 강국들에 대해 “정당한 생존권을 확인하고, 이 권리에 대해 부당 부정한 압박을 가하는 경우에는 어디까지나 이와 싸우는 각오를 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하였다. “정의 인도에 입각하여 세계 각국의 국민평등 생존권 확립을 위해, 경제적 제국주의를 배격하고”, 황인들에 대한 인종 차별도 철폐해야 한다고 하였다. 이 글에서 고노에는 1차 대전 전후의 국제질서가 본질적으로는 기성의 강국과 미성의 강국, 현실유지세력과 현상타파 세력 간의 대립 구도라는 시각을 보이고 있다. 그는 영국과 미국, 프랑스 등을 현상유지세력이라고 간주하면서, 이에 도전한 독일은 물론 일본도 미성(未成)의 강국, 현상타파세력에 속한다는 인식을 보인다. 따라서 일본으로서는 현상유지세력이 자신들의 이익을 확보하기 위해 구축한 국제연맹이나 군비축소 등의 움직임에 무비판적으로 따라가서는 안되고, 국민평등 생존권의 관념에 따라 경제적 제국주의나 인종차별에 대해 반대해야 한다는 대외정책론을 제시한다. 3
이 글을 발표한 직후 고노에는 파리강화회의에 참석하는 정계원로 사이온지 긴모치(西園寺公望)의 추천으로 일본측 전권대표 일원으로 참가하게 되었다. 그는 프랑스의 클레망소, 영국의 로이드 조지, 미국의 윌슨 대통령, 그리고 일본측 사이온지 대표 등이 참석한 파리강화회의 제5차 총회의 현장을 직접 참관하였는데, 이 경험이 그의 국제질서인식을 더욱 굳히게 하는 결과가 되었던 것 같다. 파리 강화회의를 참관한 이후에 작성한 글에서 그는 (......) 국제질서에는 힘의 지배에 의한 철칙이 여전히 남아 있다고 관찰한다.
이러한 글에서 나타나는 고노에 후미마로의 세계질서관은 국제협조주의를 표방하던 당대 일본 주류 정치인들이나 지식인들의 그것과는 사뭇 대척적인 성격을 갖고 있었다. 오히려 같은 시기 "일본개조대강"을 집필하면서 영국 및 소련과의 대립을 주장한 기타 잇키(北一輝)의 주장이나, 미국과의 최종전쟁 준비를 주장한 육군 소장파의 리더 이시하라 간지(石原莞爾)의 주장과 맥락을 같이 하고 있다. 4
(......) 즉 일본이 만주사변을 일으키고 국제연맹을 탈퇴하던 시기에, 국제연맹을 필두로 한 국제사회는 동아 평화 파괴의 주요인을 일본에게 돌렸지만, 고노에는 국제평화 교란의 근본 원인이 현상만족국가들에 의한 영토와 자원의 편재에 있다고 주장하였고, 일본의 만주사변이나 국제연맹 탈퇴는 가지지 못한 국가의 입장에서 생존권을 지키기 위한 당연한 결정이라고 반박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주장에 대해 당시 군부 소장파 그룹이나 혁신적 성향의 지식인 그룹들이 지지를 보냈다. 이러한 지지를 바탕으로 고노에 후미마로는 동경대학 교수 료야마 마사미치(蠟山政道), 해군의 이시카와 신고(石川信吾), 육군의 스즈키 테이이치(鈴木貞一), 그리고 관료계 인사들을 규합하여 (......)
이후는 중일전쟁의 발발과 확전을 다루면서, 그 과정에 고노에내각이 한 일은 고노에가 일찌기 공개한 논지의 연장선상에 있었다고 말합니다. 5
(......) 국제적 압박에 대해 고노에 정부는 10월 6일 외무성 정보부장 가와이 다츠오(河合達夫) 성명을 통해 대응하였다. 가와이 정보부장은 갖고 있는 국가 (持ってる国)가 갖고 있지 않는 국가에 대해 기득권의 양보를 거부한다면, 그것 을 해결하는 길은 전쟁에 의존하는 방법 외에는 없지 않는가라는 논리를 전개하였다. 이같은 성명은 1919년부터 고노에가 전개해온 국제질서론을 그대로 표현한 것에 다름아니었다.
(......) 쇼와연구회의 멤버들은 활발한 언술활동을 통해, 고노에의 중일전쟁 수행정책을 뒷받침하였다. 동경대학 교수 료야마 마사미치(蠟山政道)는 1938년 2월에 작성한 글을 통해, 지나사변이 장기전으로 접어들고 있음을 지적하면서, 지나 사변이 단순한 국가간 전쟁이 아니라 생활공동체의 지역적 재편성 운동으로서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평가하였다. 즉 기존의 영국이나 독일이 식민지 확대 과정에서 추구했던 경제적 이익의 확보나 통제경제 수립과 달리, 일본은 동아 (東亞)라고 하는 지역에서 문화적, 기술적, 과학적으로 생활공동체를 만들어야 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과업을 수행하기 위해 국내적으로 종래의 정치 기구와 행정기구를 대체하여 새로운 국민적 단결이 필요하고, 참신한 인재 발 굴에 의해 새로운 지도 조직이 만들어질 필요가 있다고 제언하였다. 미키 키요시(三木淸)는 당시 일련의 강의와 논설 집필을 통해 지나사변이 동아시아 국제질서와 정치사상의 영역에서 갖는 의미를 제시하려 하였다. 그에 의하면 일본은 지나사변을 통해 동아의 통일, 즉 일본, 만주, 중국을 동아협동체(東亞協 同體)로 재구성하는 계기를 갖게 되었으며, 이를 통해 궁극적으로 세계의 통일 로 갈 수 있다고 의의를 부여하였다. 일본으로서는 동양문화의 잠재적 가치들 을 발견하여, 구미의 자유주의나 공산주의, 그리고 중국의 삼민주의를 능가하 는 새로운 문명, 즉 동아협동체를 주도적으로 건설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 이같이 고노에 수상은 1937년 7월, 노구교 사건이 발발한 이후 1939년 1월, 그가 수상직을 사임할 때까지 중국 대륙에 대한 병력의 증파, 식민지 지역 조선에서의 지원병제 도입, 천황을 정점으로 한 전쟁지도기구의 설치, 전쟁의 목표에 대한 대외 성명의 발표, 국제연맹 및 미국으로부터의 반발에 대한 적극적 대응 등을 주도하였다. 또한 그를 추종하는 일군의 지식인들은 동아협동체론 등의 담론 제시를 통해, 고노에가 표방하였던 동아신질서의 역사적 의의를 부각시키려 하였다. 그런 점에서 중일전쟁의 발발 및 확대 과정에서 그가 중일전쟁 발발 및 확대에 적극적으로 임했던 것은, 그의 국제질서관과 분리하여 설명할 수 없다. 그는 세계를 가진 국가들과 가지지 못한 국가들의 대결구조로 파악하고, 가지지 못한 국가로서 일본이 나름의 영토와 자원을 확 보하는 권리를 가져야 한다고 주장해 왔다. 이러한 입장에서 중국과의 전쟁 및 영역 확대는, 일본으로서는 “가진 국가”로의 반열에 들어서는 전략에 다름아 니었다. 그가 중일전쟁을 확대하면서 명분으로 제시한 “동아신질서” 건설은 “가 진 국가”와 동등한 권리를 확보하려는 야욕의 또다른 표현이었던 것이다.
그 다음은, 일본이 태평양전쟁을 하게 된 기반을 고노에가 닦았다는 이야기.
(......) 가장 큰 현안 가운데 하나는 독일과의 동맹체결 문제였다. 1939년 9월, 폴란드를 침공하면서 제2차 세계 대전을 일으킨 독일은 1940년 5월에는 베네룩스 3국 및 프랑스를 침공하여, 유럽에서 세력을 확대하고 있었다. 이미 영국 및 미국과의 군축조약을 파기한 일본 내부, 특히 육군에서는 독일 및 이탈리아와의 동맹 체결을 추진하려는 움직임이 강화되고 있었다. 그러나 해군 대장 출신의 전임 요나이 수상은 독일 및 이탈리아와의 3국 동맹 체결에 대해 반대입장을 분명히 하고 있었다. 그 후임이 된 고노에 2차 내각도 같은 문제에 봉착하게 되었다.
고노에는 제2차 수상 임명 직후 외상에 마츠오카 요스케(松岡洋右), 육상에 도조 히데키 등을 기용하는 내각을 구성하였다. 이 인사정책은 고노에 수상이 삼국동맹 체결에 어떤 입장을 갖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방향타였다. 외상에 기용된 마츠오카는 그 직전인 1940년 5월, 발표한 논설에서 미국과 일본의 충돌이 불가피하며, 동아신질서를 건설하기 위해 일본은 독일, 이탈리아와의 추축(樞軸)체제 구축이 필요하다고 주장한 바 있었다. 또한 그는 1940년 7월 21일, 뉴욕 헤랄드 트리뷴지와의 인터뷰를 통해 민주주의와 전체주의의 대결에서 후자가 분명히 세계를 정복할 것이고, 일본에서는 인민의 의사에 따라 파시즘이 발전할 것이라는 의견을 피력한 바 있었다. 마츠오카의 생각은 사실 고노에 후미마로의 동아신질서론이나 양세력 대립론과 유사한 것이었다.
고노에 수상과 마츠오카 외상은 내각 구성 직후 자신들의 대외정책 구상을 정부의 전략문서에 표명하였다. 1940년 7월 27일, 대본영 정부연락회의에서 결정된 문건인 「세계정세의 추이에 수반한 시국처리요강」이 그것이었다. 이 문서에서 고노에 내각은 프랑스의 패배로 인해 무주지 상태에 처한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베트남) 지역에 군대를 진출시켜 군사기지를 건설하고, 네덜란드령 인도차이나 지역의 천연자원을 외교적 수단으로 확보한다는 남방진출 전략을 밝혔다. 또한 전임 요나이 내각에서 반대해온 독일, 이탈리아와의 3국 동맹 체결도 추진한다는 방침을 천명하였다. 6
이같은 전략은 곧 실행에 옮겨졌다. 같은 시기인 9월 27일, 베를린에서 일본, 독일, 이탈리아 3국 대표단 간에 삼국동맹 조약이 체결되었다. 이 조약은 유럽 전쟁이나 중일전쟁에 관여하지 않은 다른 국가에 의해 공격받을 경우, 상호간에 정치적, 군사적, 경제적으로 지원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이로써 일본은 1902년 영일동맹 체결 이래 견지해오던 해양국가와의 동맹 및 조약 중시태세에서 일탈하면서, 대륙국가와 처음으로 동맹관계를 맺게 되었다. 3국동맹 체결 직후, 중국 남부와 해남도 등지에 주둔해 있던 일본군은 프랑스의 패배로 인해 무주공산 지역이 된 베트남 북부 지역에 무혈 진주하였다. 고노에 수상은 10월 4일 가진 기자회견에서, “만일 미국이 일본, 독일, 이탈리아의 입장을 이해하지 않고, 이 조약을 도발적인 행동으로 받아들인다면, 세나라는 단호하게 싸울 것이다”라고 발언하였다. 고노에는 3국동맹이 대미 전쟁을 염두에 둔 것임을 시사한 것이다.
고노에 수상은 이러한 대외정책을 추진하면서, 국내적으로는 기존 정당을 대체한 새로운 정치조직을 출범시켰다. 1940년 10월 12일에 발족한 대정익찬회(大政翼贊會)가 그것이었다. 이 조직은 기존의 정우회, 민정당, 사회대중당 등 정당을 해체하고, 중일전쟁을 수행하는 정부의 정책을 일원적으로 뒷받침하기 위한 목표를 갖고 있었다. 특히 고노에 후미마로의 대내외 정책구상을 뒷받침해온 쇼와연구회의 주요 멤버들이 대거 신조직으로 이동하면서, 새로운 차원에서 고노에 내각을 지원하는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
이러한 일본군의 공세적 대외정책과 국내태세 정비는 영국은 물론, 미국의 대일 경계를 강화시켰다. 독일과 힘겨운 전쟁을 벌이고 있던 영국은 동남아에서 버마루트를 개통하면서 중일 전쟁에 대비한 태세를 갖추었고, 미국의 루즈벨트 대통령은 우선 유럽 전선에서 독일을 패퇴시키기 위한 전략을 강구하면서도, 일본의 공세적 경향을 경계하기 시작했다.
1941년에 접어들면 유럽에서의 전황은 더욱 독일에게 유리한 국면이 전개되었다. 독일은 여전히 저항하는 영국에 대해 야간 공습을 지속하였고, 발칸반도 및 북유럽도 독일의 판도가 되었다. 아프리카 대륙에서도 독일 기갑부대가 영국군에게 고전을 강요하였다. 이같은 상황에서 고노에 내각은 1941년 7월 2일, 어전회의를 소집한 가운데 향후 일본의 대외정책에 관한 중요한 결정을 내리게 되었다. 「정세의 추이에 수반하는 제국국책요강」이 그것으로, 이 문서는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남부지역에 대한 일본군의 진주, 그로 인해 반발하게 될 영국 및 미국과의 전쟁 준비 실행 등을 대외정책의 과제로 제기하였다.
이같은 전략방침에 따라 1941년 7월 24일, 일본군은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남부지역에 대한 군사적 진주를 단행하였다. 이로써 베트남 지역이 전부 일본군의 관할 구역으로 장악되게 되었다. 나아가 일본 제국의 육군과 해군은 동남아에 대한 군사적 진출 이후 미국과 대결할 가능성에 대비하기 시작했다. 육군은 미국이 식민지화하고 있던 필리핀과 네덜란드령 인도차이나, 그리고 영국이 관할하던 말레이, 싱가포르, 버마 등지에 대한 군사공세를 계획하고 있었고, 해군도 미국 함대의 필리핀 방면 진출 가능성에 대비한 전쟁계획을 가다듬고 있었다.
이같은 일본 육해군의 군사전략 책정 움직임과 동남아방면 군사작전 실행은 미국의 강력한 반발을 불러 일으켰다. 루즈벨트 정부는 일본에 대한 보복 조치로 재미 일본인의 자산을 동결하고, 대일 석유 금수 조치를 취하기 시작했으며, 퇴역한 맥아더 대장을 극동지역 미군 최고사령관으로 임명하는 등 일본과의 전쟁에 대비하기 시작했다. 1941년 8월 8일에서 8월 14일에 걸쳐 미국 루즈벨트 대통령은 영국의 처칠 수상과 대서양상에서 회담을 갖고 독일 등과의 전쟁에 대비한 전쟁원칙과 전략을 담은 대서양 헌장을 공표하였다.
그런데 미국과의 긴장이 고조되자 고노에 수상은 나름 위기감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미국 지도자들과의 양자 회담을 추진하여 미일간 위기를 타개하려는 움직임을 보인다. 8월 초, 고노에는 미국의 헐 국무장관과 일본측 노무라 제독간 회담 추진을 지시했고, 이어 자신도 루즈벨트 대통령과의 회담 추진을 구상하고, 8월 4일 천황에게 보고까지 하였다. 그러나 미국측은 일본과의 어떠한 회담에도 응하지 않았다.
이러한 미국과 영국의 동향 하에서 1941년 9월 초까지 일본 제국 육군과 해군의 전쟁계획이 통합되었다. 9월 3일 개최된 정부 연락회의에서는 아래와 같은 사항들이 결정되었다. 즉 일본이 10월 말까지 미국과의 전쟁 개시를 주저하지 않는다는 결의 하에 전쟁 준비를 완료하고, 동시에 외교적 수단을 통해 미국 및 영국에 대한 요구들을 달성하도록 노력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일본측 요구가 달성될 전망이 없는 경우에는 미국과의 전쟁 개시를 즉각 결정한다는 것이다. 9월 5일, 고노에 수상은 이러한 회의 결과를 천황에게 보고하였다. 그리고 9월 6일, 천황이 참가한 가운데 열린 어전회의에서 육군과 해군은 대미 전쟁을 고려한 전쟁계획을 보고하였다. 일부의 자료에 의하면 이 회의에서 천황은 육해군의 전쟁계획에 대해 소극적인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이로 인해 고노에 수상은 다시 미국과의 다각적인 외교접촉을 재개하여 개전을 회피하려는 움직임을 보인다. 그러나 10월 14일 개최된 각의에서 육군상 도조 히데키가 일본이 미국의 주장에 굴복한다면, 중일전쟁의 성과는 무로 돌아가고 만주국의 존립은 위기에 빠지고, 조선의 식민지 통치도 동요하게 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결국 만주사변 이전의 소일본으로 회귀하는 결과가 되기 때문에, 미국과의 외교교섭을 통한 대미 양보를 받아들일 수 없다고 강변하였다. 이러한 육군측의 반발이나 전쟁계획에 대해 천황이나 고노에 수상이 적극적인 반대입장을 표명하지 않음으로써, 미국과의 전쟁계획은 돌이킬 수 없는 국면을 맞게 되었다. 결국 고노에는 수상 사임을 표명하고, 10월 18일, 육군상 도조 히데키가 후임 수상에 임명되었다. 도조 히데키 수상의 주도에 의해 그해 12월 7일, 미국의 하와이, 필리핀, 그리고 동남아 각 지역의 미국, 영국, 네덜란드령 식민지 지역에 대한 일본 측의 대대적인 공세가 전격적으로 단행되면서, 기존에 진행되던 중일전쟁에 더해 새롭게 아시아태평양 전쟁이 발발하게 되었다.
이로 인해 미국과의 태평양전쟁 개전 책임이 도조 히데키 수상에 있다고 하는 것이 일반적인 인식이었다. 그러나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1940년 7월, 제2차 고노에 내각이 출범한 이후 선택한 대외정책이 결과적으로 대미개전의 길을 열어 놓은 사실을 부정할 수 없다. 고노에 내각은 1940년 7월,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에 대한 군사적 진주를 단행하고, 9월에는 독일 및 이탈리아와 3국 동맹을 체결하면서, 영국 및 미국에 대응하는 태세를 본격화하였다. 국내적으로 기존의 정당들을 대체한 대정익찬회를 조직하면서 공세적 대외정책을 일원적으로 추진할 수 있는 정치체제를 구축하였고, 1941년 7월에는 베트남 남부에 대한 군사적 진출을 단행하였다. 이같은 대외정책의 선택이 이미 독일과의 전쟁에 돌입한 영국에게는 전장의 확대를 의미하는 것이었고, 아태지역의 현상유지를 바라던 미국에게는 심각한 군사적 도전으로 받아들여졌던 것이다. 결국 현상유지세력에 대해 현상타파의 시도를 하는 것이, 가지지 못한 국가의 당연한 권리라고 인식해 오던 고노에 후미마로의 국제질서관이 미일 대립의 구도를 만들어낸 것이다. 그런 점에서 고노에 후미마로의 국제질서관과 대외정책 실행은, 아시아태평양전쟁의 원인을 물을 때, 반드시 고려되어야 하는 중요 요인임에 분명하다.
Ⅴ. 맺는 말
전쟁의 원인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크게 인간의 호전적 본성, 국가의 속성, 그리고 국제질서의 구조 등 3가지 측면에서 그 요인을 찾으려 했다. 이러한 요인들 가운데 최근 국제정치학은 국제질서의 구조에서 전쟁의 원인을 찾으려는 경향도 보여주고 있다. 예컨대 세력전이론(power transition) 등의 입장이 그러하다. 물론 국가 간의 국력 배분 변화 등 국제정치의 구조적 요인이 전쟁 기원에 관한 연구에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해야 함은 물론이다. 그에 더해 인간의 요인, 즉 국가지도자의 심리적 속성이나 세계관, 그리고 그로 인해 파생되는 정책적 경향 등도 전쟁원인에 관한 연구에서 도외시할 수 없다. 예컨대 제2차세계대전의 발발 원인을 분석함에 있어 독일 총동 아돌프 히틀러의 세계관이나 대외정책론을 배제하고서는 설명이 충분치 못할 것이다. 본 고는 그러한 입장에서 근대 일본의 중요한 전쟁들인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의 발발 요인을, 당시 수상으로서 대외정책결정에 핵심적으로 참가한 인물인 고노에 후미마로의 국제질서관과 그 결과로서의 대외정책론을 중심으로 설명하려 하였다.
고노에 후미마로는 20대 청년기부터 국제질서를 “가진 국가”와 “가지지 못한 국가”, 현상유지국가와 현상타파국가간의 양극적 대립구조로 파악하였다. 그리고 제1차 세계대전의 승전국으로 부상한 일본의 위상을, 영국이나 미국 등의“가진 국가” 혹은 “현상유지국가”에 대비하여, “가지지 못한 국가” 혹은 “현상타파국가”로 설정하였다. 이러한 세계관을 바탕으로 그는 영국과 미국 등 현상만족국가들이 자원이나 광대한 영토보유에 관한 기득권을 일본이나 독일 등 현상타파국가들에 양보하지 않는다면, 진정한 의미에서의 국제평화는 달성되지 못할 것이라고 보았다. 그리고 현상타파국가로서 일본은 영국이나 미국에 대해 그러한 기득권의 양보를 요구할 수 있고, 그것이 받아들여지지 않을 경우 전쟁수단에 호소할 수도 있다고 보았다.
1920년대 후반 국제적인 공황 발생과 일본 국내에서의 다이쇼 데모크라시체제 약화가 중첩되면서, 이러한 고노에의 국제질서인식은 일본의 군부 지도자들과 혁신 관료, 그리고 지식인 일부에게 확산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고노에는 1937년 6월, 수상에 임명되어 제1차 내각을 구성하였고, 한달 뒤에 중국 대륙에서의 일본군과 중국군간 무력충돌에 직면하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일본이 취한 정책, 즉 중국에 대한 병력의 증파, 장개석 정부와의 평화교섭 중지 및 그를 대체한 왕조명 정권의 결성, 영국 및 미국에 대응하는 동아신질서의 선언 등은 고노에의 국제질서인식에서 파생된 대외정책이었다. 즉 일본제국 최고정책결정자의 반열에 올라선 고노에의 국제질서인식은 제국 일본의 대륙전쟁 결정 및 실행 과정에서 중요한 추동력이 되었던 것임을 확인할 수 있다.
같은 경과는 1940년 7월, 그가 재차 수상으로 임명되면서 제2차 내각을 조직 한 이후에도 나타난다. 그는 전임자와 달리 마츠오카 외상 등과 긴밀히 협력하 면서, 독일, 이탈리아를 포함한 3국 추축동맹을 체결하였고, 북부 인도네시아에 대한 군사적 진주를 결정하였다. 국내의 여러 정당들을 통합한 대정익찬회를 결성하여, 일본 정부의 대외정책에 대한 국내적 지지기반을 결속하였다. 이어 남부 베트남에 대한 군사적 진주를 단행하였고, 미국과의 군사적 대결을 포함 하는 육, 해군의 전쟁계획을 적극적으로 제지하지 않았다. 물론 그는 육해군의 전쟁계획이 공표된 이후 대미 협상을 추진하면서, 군사적 대결을 회피하려는 모습도 보였다. 그러나 그 직전 시기까지 그가 수상으로 추진했던 정책들이 대미 개전의 길을 열어 놓은 것을 부인할 수 없다. 결국 현상타파세력으로서의 일본이 현상유지세력으로서의 미국 및 영국에 도전하는 것이 일본의 대외정책 이 되어야 한다는 지론을 갖고 있었던 그의 국제질서관과 대외정책론이 미일개 전의 중요한 요인이 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1930년대와 1940년대의 아태지역 질서를 크게 교란시켰던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의 기원을 탐구할 때, 고노에 후미마로 같은 정치지도자들의 국제질서인식 및 대외정책론이 고려되어야 할 중요 요소의 하나임을 확인할 수 있다.
※ 추가. 일본어 읽을거리)
ㅡ 고노에 후미마로. 일본어 위키백과
ㅡ 아사히 신문, 고노에 후미마로. 방위성 쇼지 준이치로의 해설
두 번째 링크글 중 일부를 딥엘로 기계번역해본 것. 제가 식별할 수 있는 오류는 고쳤습니다. 인명과 지명 등:
미국에 품은 환상과 오판
(......)
쇼지 씨는 "고노에가 미국에 대해 많은 환상을 갖고 있었다. 미국은 강대국이기 때문에 생존권에 근거한 일본의 정당한 행동을 이해해 줄 것이라는 착각이 있었다"고 말한다. 1941년 7월, 일본은 인도차이나 남부(南部仏印)에 진주했다. 고노에의 낙관적인 예상과 달리 미국은 재미 일본 자산의 동결 및 대일 석유 전면 금수 조치로 대응했다. 일미 양국은 단숨에 전쟁이라는 위기 상황을 맞이했다.
1937년 7월, 제1차 고노에 내각이 출범한 지 한 달 뒤인 1937년 7월, 노구교(盧溝橋) 사건이 일어났다. 내각은 처음에는 사태 불확대 방침을 취했지만 결국 화북 파병을 결정했다. 전쟁은 상하이까지 번져 전면전으로 확대되었다. 쇼지는 "고노에는 강력한 전의를 보이면 중국이 양보할 것이라는 안일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고 말한다.
쇼지에 따르면, 당시 일본에서는 시안 사건 등을 계기로 오늘날의 중국은 과거의 중국과 달리 통일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는 '중국 재인식론'이 대두되고 있었다. 그러나 고노에가 그러한 중국의 현 상황을 이해하지 못했고, 장제스 등의 실력을 과소평가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또한, 노구교 사건 당시 고노에가 취한 정책은 '고노에의 선제공격론'이라고 불렸다. 고노에는 "군인들에게 선제공격하고 강경한 정책을 펼치면 군대의 신뢰를 얻을 수 있다. 그러면 정치의 주도권이 정치인의 손에 돌아와 육군을 견제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41년 10월 오기외장 회담에서 도조 히데키(東條英機) 육군대신 설득에 실패해 내각 총사퇴를 강요당했다. 쇼지 씨는 고노에에 대해 "그 자리의 분위기에 휩쓸려 끝까지 신념을 관철하지 못했다. 사상가나 평론가로는 어느 정도 평가할 수 있지만, 정치가로는 적합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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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은 정세를 읽고 있는가
'국제정세를 잘못 보고', '결단을 내리지 못하는' 당시 일본의 실책은 고노에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당시 일본이 개전에 기울어진 이유 중 하나는 유럽에서 나치 독일의 진격이 있었고, 1941년 6월에는 독소전쟁이 시작되면서 소련을 가상의 적으로 여겼던 일본 내에서도 개전론이 강해졌기 때문이다. 다만 미국 정부는 1941년 11월에 소련에 무기 대여 등 물자를 지원하기로 결정했다. 소련이 대규모 반격 작전을 시작한 것은 진주만 공격 직전이었다.
고노에가 교착상태에 빠진 미일 협상을 타개하기 위해 루즈벨트 미국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에 기대를 걸고 노력했지만, 결국 미국 측의 소극적인 태도로 인해 실현되지 못했다. 쇼지 씨는 만약 미일 정상회담이 성사되었다면, 설령 합의에 이르지 못했더라도 시간을 벌 수 있었고, 미일 개전 시기가 늦어졌으며, 독일과 소련의 정세 변화로 일본은 쉽게 개전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지적한다. 7 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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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전쟁은 질 것이다. 어떻게 질 것이냐다."
12월 8일 오전 6시, 미영과의 전쟁 개시를 알리는 대본영의 발표가 있었다. (......) 쇼지 씨에 따르면, 이 시점에서 시민들은 전쟁을 알리는 보도에 긴장하고 상황을 파악하려는 분위기가 강했다고 한다. 오히려 지식인들은 환호하며 환영했다. (......) 고노에는 원치 않았던 대미 전쟁이 시작되면서 진주만 공격을 냉랭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개전 직전에 총리직을 사퇴한 자신을 '겁쟁이', '비겁자'라고 부르는 정계와 언론을 향해 "역시 이대로 가면 이길 수 있다고 믿는 것일까. 내년(1943년) 신년하례식에서는 나에게 뭐라고 인사할 것인가"라고 반박했다.
또 12월 8일 진주만 공격 당일에는 "이 전쟁은 진다. 어떻게 지는지, 너는 이제부터 연구해라, 그것을 연구하는 것이 정치가의 임무다"라고 측근들에게 말했다. 이듬해 1942년 1월, 곤에가 기토 고이치(木戸幸一) 내무대신에게 전쟁 종결 시기를 서둘러 검토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기토는 2월 5일 천황을 알현하고 "대동아전쟁은 쉽게 끝나지 않을 것이므로 하루라도 빨리 기회를 포착해 평화를 가져와야 한다"고 상정했다.
1943년 여름 무렵부터 적극적으로 종전 공작에 나서기 시작했고, 1945년 2월에는 천황에게 보내는 고노에 상소문을 통해 하루라도 빨리 전쟁을 종식시켜야 한다고 호소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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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중에 시간나면 더 보고 싶은 문서:
일본어 위키백과 등, 이 인물 이름을 일본어로 치면 나오는 문서들.
- 유학파라니까, 19세기 후반~20세기 초 영국이나 유럽의 어떤 정치가 헤어스타일을 따라했을지도 모르겠네요. [본문으로]
- 빌헬름 2세 역시, 비스마르크의 정치에서 독일인을 '해방'시켜줄 젊은 세대의 상징같이 기대받았죠. [본문으로]
- 그래봐야 당시 조선에 대해서는 일본도 별다를 게 없는 "제국주의 현상유지국가"였지만요. [본문으로]
- 그러나 이시하라 간지도 고노에 후미마로보다는 덜했다는 것이.. 훗날 중일전쟁때, 미국과의 전쟁을 상정한 이시하라 간지는 중국에서 역량을 소진한다며 확전을 경계했지만, 고노에는 무시했다고 합니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내가 '이 바닥의 미친X'이 되면 군부가 질려버려서 정치권을 얕보지 못하겠지" 하는 생각이라도 있었다는 얘기도 있지만.. 하지만 그의 생각보다 일본군부는 더 미쳐나가서, 그리고 그 '미친 신세대'의 생각은 또 아이돌노릇하던 고노에 자신이 불어넣은 사상도 있어서, 결국 고노에 자신도 고삐를 놓쳐버렸고, 한편 대외적으로 '미친 X' 낙인이 찍혀버린 고노에를 미국은 협상의 상대로는 좋게 생각하지 않게 됐고.. [본문으로]
- 비록 그가 입으로는 "대본영이나 육군부나 군령부(해군부)의 강경파가 하고 싶은 깽판을 다 치게 두어 그들이 실패하면 내각이 주도권을 잡을 의도" 운운하는 소리를 했다지만 , 그건 진짜 변명. 고노에 자신도 그런 '미친놈들의 대열'에서 맨 앞줄에 들어가는 자였다는 것. 설사 그 의도가 사실이더라도 군부가 아닌 그 자신이 몰아친 내각결정이 결정적인 요소가 되어 대미개전까지 일직선으로 갔다는 점에서 변명의 여지가 없죠. [본문으로]
- 미국의 對일 무역 규제는 1938년부터 시작됐는데, 처음에는 항공기 부속같은 것이었다가, 공작기계 등과 함께 항공기용 석유제품 정도의 수출 금지정책 시간표를 발표한 때는 1940년 7월이었다고 합니다. 다만, 초기에는 아직, 일본이 당시 세계 3위던 자체 해운선단을 이용해 수입해가는 것을 막지는 않았다고 합니다. 이후 일본군이 인도차이나까지 내려간 시점인 1941년 7월부터는 전면적인 교역금지가 시행됐다고 합니다. [본문으로]
- 미국이 소극적이었던 이유는, 중일전쟁에서 미국이 중국편을 들고 있었던 것과 함께, 중일전쟁에 대한 고노에 내각의 강경한 對중국 정책을 알고 있는 미국무성 고위관리들이 고노에와의 정상회담은 '석유금수를 지연시며 중일전쟁을 계속하려는 일본의 시간끌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라는 얘기가 있습니다. 실은 당시 일본 내각과 군부는 진통끝에 전쟁여부를 그 회담을 비롯한 외교의 성과를 보고 결정하려 했고, 전쟁반대파는 마지막 수단으로 그 정상회담에 기대고 있었다지만요. 고노에 집권 초기, 앞 번역분량에 나오듯, 군부보다 강경한 정책을 펼친 것이 이렇게 돌아왔으니 업보라면 업보. [본문으로]
- 그런데 고노에 내각때 임명한 외무장관과 주독 일본대사는 대단한 "독일빠"여서, 독일에 불리한 정보는 버렸다는 지적이 있습니다. 심지어 독일 본토가 폭격받는 시점에서도 주독 일본대사는 독일정부의 프로파간다를 앵무새처럼 본국에 토스하고 있었다니.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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