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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에는 민간에서 금속활자를 주조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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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에는 민간에서 금속활자를 주조

정리 먼저.

 

고려, 조선시대의 금속활자 활용은 수많은 한자만큼 활자를 준비해야 하는 문제가 큰 장애물이었다고 함. 지금 우리가 컴퓨터용 글꼴을 디자인하려 할 때 한글 조합형기준 글꼴 1만여 자를 만드는 게 영문 52자를 만드는 것보다 훨씬 힘들어 제대로 만든 상업용 글꼴이 아니면 완성형 2350자 정도만 만들어 배포한 경우가 많은 것처럼. 그리고 도트매트릭스, 조합형 라인 프린터가 보급되기 전에는 최소한 종이 한 면에 찍을 때 필요한 만큼은 같은 글꼴을 여러 벌 갖춰야 했을 테니.. 결국 목판이 생명을 길게 이어감. 

조선후기에는 공공부문 뿐 아니라 서원이나 개인의 서책간행용으로 목판인쇄가 성행했다고 한다. 또한 금속활자대비 단점이 있는 나무활자[각주:1]도, 금속활자와 한자의 상성이 안 좋은 저런 면을 보완하는 용도로 사용되었고, 제작비가 싸니까 민간에서도 만들어 썼다고.

 

초기 금속활자인쇄술의 기술적인 문제는 세종대에 일단은 돌파구가 나왔지만, 한지와 먹의 특성도 생각거리. 하지만 병자호란이 끝나고 한 세대 정도 지난 1600년대(17세기) 후반이 되면, 유력 양반가에서 금속활자를 자체 주조해 문집을 인쇄한 기록이 나올 정도. 다시 백 년이 지난 1700년대(18세기) 후반에는 정부가 보유한 활자가 수십만 개, 그리고 민간에도 상당히 많아서 1800년대(19세기) 초가 되면 관이 만간이 보유한 금속활자를 빌려 쓰기도 했다고 함.  

 

다만, 이렇게 해서 인쇄한 책이 한 번에 찍은 부수가 얼마나 많았는 지가 이 글에는 설명이 없어 아쉽다.[각주:2] 교양서적이 아닌 국가의 사서나 개인의 기념문집같은 것은 한 부의 길이는 길겠지만 발행부수가 그렇게 많지는 않았을 것 같은데.[각주:3] 언급할 만한 굵직굵직한 타이틀이 그렇지 자잘한 타이틀은 대단히 많았을 테니 활자 주형도 그렇게 많이 보유했겠지만.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조선 후기 금속활자 (한국 미의 재발견 - 과학문화, 2004. 12. 31., 김인덕, 서성호, 오상학, 오영선)

 

[네이버 지식백과] 조선 전기 금속활자 (한국 미의 재발견 - 과학문화, 2004. 12. 31., 김인덕, 서성호, 오상학, 오영선)

 

[네이버 지식백과] 목판인쇄 (한국 미의 재발견 - 과학문화, 2004. 12. 31., 김인덕, 서성호, 오상학, 오영선)

 

[네이버 지식백과] 활자인쇄 (한국 미의 재발견 - 과학문화, 2004. 12. 31., 김인덕, 서성호, 오상학, 오영선)

 

 

책 정보:

과학문화 (한국 미의 재발견 2)

김인덕 외 지음 | 솔 | 2005년 01월 10일 출간

http://www.kyobobook.co.kr/product/detailViewKor.laf?barcode=9788981337469

 

  1. 단단한 나무로 나무도장을 많이 만들어 나무틀에 짜서 찍었다고 생각하면 비슷할 듯. [본문으로]
  2. 구텐베르크 성경도 150부 남짓에 그쳤다고 하지만. https://en.wikipedia.org/wiki/Gutenberg_Bible [본문으로]
  3. 누구나 보라고 권장하는 경전은 여러 서원이나 사찰에서 필요가 있다 해도, 이런 건 대량인쇄가 목적이었을까 동일본을 보관한다는 의미가 컸을까? 금속활자본을 인쇄했다는 기록에 그치지 않고, 몇 부를 찍어서 어디에 배포해 어떻게 사용했는 지도 알고 싶은데.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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